“직업이 어떻게 되시나요?”
“네? 아~ 프리랜서예요.”
“프리랜서요? 프리랜서는 카드 발급 안 돼요!”
올해부터 내 직업은 프리랜서라고 사람들에게 공표했다. 백수라는 말보다 프리랜서라는 타이틀에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행에서 카드 발급을 거부당하고 내 정체성에 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굳이 프리랜서라고 우기는 이유는 뭘까? 왜, 나는 백수라는 말이 듣기 싫은 걸까?
사람들은 백수는 매일 놀고먹기만 하는 줄로 안다. 백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만 축내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한다.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하느라 바쁘다고 말하면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하니 너무 무리하지 말라며 걱정해주는 척한다. 백수는 한가한 시간이 넘치는 줄로 안다.
백수 생활을 하면서도 하루가 빠듯하고 매일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정해진 루틴을 하다 보면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꿈의 리스트가 항상 코앞에 대기하고 있어서 한 시간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 백수 생활에서도 루틴 마감 시간을 정해서 시간 관리를 잘해야 한다.
아침에 6시에 일어나 물 한잔을 마시고 필사와 독서로 정신을 깨운다. 아침을 간단히 하고 헬스장에 가서 9시부터 10시까지 심장박동수를 올리는 운동을 한다. 운동 후 요일에 따라 조금씩 다른 루틴이 있다. 월요일은 자기 계발 강의를 듣고 봉사활동을 한다. 화요일에는 한 주 동안 매일 한 시간씩 읽은 책을 정리해서 서평을 쓴다. 수요일에는 도서관에서 강연을 듣거나 무료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목요일에는 독서 모임과 명상 공부를 한다. 금요일에는 백수 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경제 공부를 하고 가계부도 쓰고 꼼꼼하게 돈 관리를 한다.
주말에는 독서 외에는 모두 쉬는 날이다. 되도록 외부 활동은 평일에 몰아서 하고 주말에는 루틴을 내려놓고 충분히 휴식한다. 백수지만 엄연히 주말과 평일이 구별될 만큼 지금은 건강한 루틴으로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매일 정해진 루틴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면 알맞게 몸이 지쳐있어서 아침까지 평온하게 잠을 잔다.
백수도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단계가 있고 어느 정도 높은 단계에 이르면 자부심이 생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진짜 밥만 먹는 단계에서부터 시간별 일정을 짜서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단계가 있다. 시간표 단계를 뛰어넘어 건강한 루틴이 정착되면 자신이 삶에서 의미 있게 생각하는 일을 찾아 슬기롭게 시간을 배분할 수 있다.
철밥통이라 불리는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스스로 백수 생활을 시작했다. 정년까지는 몇 년이 남았지만, 자발적으로 직장을 나온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건강 때문이었다. 과중한 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서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기로 한 거다. 만약에 일찍 퇴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열심히 일하고 있을 테지만 내 존재를 찾아가는 행복을 몰랐을 것이다.
저녁 6시에 저녁 식사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하루 중 느긋하게 즐기는 저녁 식사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감미롭다. 먹고 싶은 요리나 반찬을 만들어서 여유 있게 하는 식사는 큰 만족감을 준다. 은퇴 전에는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와서 소파에 쓰러져서 자다가 밤늦게서야 일어나 저녁을 대충 아무렇게나 먹었던 것 같다.
지금 여기에서 건강한 루틴으로 나를 위해 시간을 적절히 잘 쓸 수 있어서 기쁘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고 성장하는 루틴을 매일 다 하려면 몸이 바쁘지만 마음은 한가롭다. 나를 위한 탄탄한 루틴으로 순풍에 돛 단 듯이 인생이라는 항해를 즐길 수 있어서 날마다 가슴이 뭉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