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년으로 불리는 5060세대. 이른바 ‘100세 시대’를 맞아 인생 2막을 준비해야 하는 세대. 나 역시 누구보다 ‘삶의 질’에 관심이 많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즐겁게 살고 싶은 신중년이다. 어떻게든 인생의 전환기를 성공적으로 보내고 싶다. 뭘 하면 좋을까?
코로나19로 자주 가던 도서관이 모두 문을 닫았다. 퇴직하고 무료했던 내 일상을 채워주던 도서관의 부재로 방황하다가 도서관에서 온라인으로 ‘자서전 쓰기’ 프로젝트를 발견했다. 글쓰기를 지도해 주고 자서전까지 무료로 출판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인생의 절반을 세상의 물결 위에서 바쁘게 살다 보니 한 번도 물속으로 가라앉은 지난날을 돌아볼 기회가 없었는데 기적 같았다.
남편은 코로나19로 외출을 못 하는 상황이니 한번 해 보라고 하며 적극적으로 권했다. 나도 마음으로는 참여하고 싶었지만, 글쓰기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망설였다. 섣부르게 신청했다가 중도에 포기할까 걱정되었다. 그런데, 이런 좋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나를 돌아보고 성장할 수 있다면 고통스러워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 보자.’라고 결심을 굳게 하고 ‘자서전 쓰기’ 프로젝트에 신청했다.
예상했던 대로 자서전을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서전을 쓰다 보면 서운했던 기억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깊숙이 있는 기억의 서랍에서 서운하고 아픈 일을 꺼내 직면하는 과정은 불편했다. 자서전 쓰기를 지도하는 교수님께 옛날 기억을 떠올리면 기분이 나빠져서 글을 쓸 수가 없다고 했더니 지도교수님은 잘하고 있는 거라면서 그냥 계속 쓰라고 말했다. 교수님은 나이별로 기뻤던 일을 쓰라고 친절하게 알려주고 천천히 써도 된다고 했다. 교수님의 격려에 용기가 났고 이왕 자서전 쓰기 시작한 것은 끝을 보기로 했다.
초등학교 소풍에서 친구들이 엄마가 싸준 김밥 도시락을 맛있게 먹을 때 나는 매년 보리밥을 먹으며 서러웠다. 이 기억 때문에 나는 소풍이 즐거운 추억이 아니다. 소풍과 연관된 즐거웠던 추억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면 기죽은 어린 내가 불쑥 얼굴을 내밀고 예민해진다. 지금은 매우 흔한 양말이지만 내가 어릴 적에는 서로 새 양말을 신겠다며 동생과 아침마다 다투기도 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기죽고 형편이 좋은 친구들을 몹시 부러워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이렇게 기억나는 것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자는 마음으로 주저리주저리 계속해서 써나갔다.
불편한 마음을 참고 계속 글을 쓰다 보니 내면에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환한 햇살이 비추었다. 어렵게 살았지만 도움받았던 것, 감사할 것들이 보였다. 유쾌하지 않아 떠올리기 싫은 과거 사건에 매몰되어 놓쳤던 전체 맥락을 보게 되었다. 나를 희생자로 여기는 불편한 마음 때문에 유연하게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줄어들자 원망스러웠던 상황도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그러면서 나를 이해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잘 살아준 내가 기특했다.
자서전 쓰기 참여자들끼리 모둠을 편성해서 서로 글을 발표하고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나와 같은 모둠에는 80세 왕언니 두 분이 있었다. 우리보다 더 어려운 시대를 사셨기 때문에 이분들이 겪은 고난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한 분은 해방된 다음 해에 초등학교 입학했고 6학년 넉 달이 끝나기 전에 6.25 전쟁이 발발하여 수업이 중단되었다고 했다. 고달픈 피난살이를 했고 전쟁이 멈춘 후에는 돈이 없어 전차를 타지 못해 학교까지 걸어 다녀야 했는데 신발이 성할 날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학교에서 문학반 활동으로 교내 신문을 발행하는 일을 하면서 출판사를 드나들던 일이 즐거운 추억이라고도 했다. 한 분은 남편이 매우 아프셨는데 포기하지 않고 극진히 간호한 덕분에 건강해지셨고 암담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했다.
두 분은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온라인 수업에 참여하셨는데 80세 나이에 늦게라도 자서전을 써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자서전 쓰기에 큰 의미를 두셨다. 공책에 손으로 글을 쓰면 손녀가 컴퓨터로 작업하고 그렇게 자서전 출판까지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두 분이 80년 된 낡은 기억 서랍장을 열고 글 쓰는 것을 보면서 무슨 일이든 결코 늦을 때란 없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기억에는 흘러간 시간만큼 두께로 먼지가 쌓여 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글을 쓰는 것은 기억 위 먼지를 닦아주고 햇볕을 쏘여준 다음에 새 추억 서랍에 다시 넣는 일이다. 유치원적 나, 초중등 학창 시절의 나, 대학생 때의 나,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의 나, 결혼 후의 나, 엄마가 된 나, 40대의 나, 50대의 나를 수시로 만난다. 좋은 기억도 있고 억울한 기억도 있는데 어쨌든, 그때 내가 반갑고 애틋하고 대견했다.
포기할 뻔한 고비를 몇 차례 넘기고서야 겨우 자서전을 완료했다. 온라인으로 하는 출판 기념회에서 소감을 말할 때는 서투르게나마 해냈다는 기쁨 때문에 울컥했다. 어쨌든 자서전 쓰기 과정에서 나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고 나이를 먹을수록 줄어만 가던 자존감도 올라갔다. 앞으로 살아갈 남은 인생은 내가 결정하고 선택할 부분이라는 깨우침도 얻었다.
인생의 전환기를 맞은 신중년에게 자서전 쓰기와 같은 글쓰기를 권하고 싶다. 어쩌다 하게 된 자서전 쓰기를 계기로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아마도 미래의 내가 지금 글 쓰는 나를 떠올린다면 분명히 반기며 대견해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