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는 딸이 영어가 안 되는 엄마가 편하게 지내라고 한인 민박을 예약해 놓았다. 나흘 동안 머물렀던 민박집은 독일에서 작곡을 전공한 엄마와 일곱 살 아들이 사는 아파트였다. 우리말을 하고 우리 음식을 먹으니 너무 편했다. 고등어구이, 잡채, 불고기, 열무김치, 쌀밥, 된장찌개 등을 먹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보내온 김치를 먹으니 입맛이 살아났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는 민박집 아들은 붙임성이 좋았다. 낯가림도 없고 친근하게 말도 잘 걸었다. 내 방에 와서 놀기도 했는데 며칠 사이에 정이 들어서 헤어질 때는 조금 섭섭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2018년 여름 독일에서 무더위와 열대야 현상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야 했다. 원래 베를린은 여름에도 그다지 덥지 않다고 했다. 베를린에 있는 아파트에는 에어컨이 없다. 에어컨이 없는 민박집에서 매일 밤에 30도 이상의 높은 기온 때문에 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수면 부족으로 낮에도 피곤하고 힘들었다. 낮에도 더위를 무릅쓰고 베를린 장벽, 개선문 카이저 빌헬름 교회, 박물관 섬 로레흠 인젤을 딸과 함께 다녀야 했다. 큰맘 먹고 간 여행인데도 불구하고 베를린에서 있는 동안 내내 즐겁지 않았다. 인제 와서 돌이켜 보면 다시 가기도 어려운데 피곤해도 참고 즐겁게 여행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어느 나라든 마트에서는 외국어 한마디 못해도 그 나랏돈만 있으면 물건을 살 수 있다. 딸이 공부하는 오전 시간 동안에는 혼자 트램을 타고 가까운 쇼핑센터에 가 보았다. 혼자서 쇼핑센터 복합상가 매장에 구경 나갔다가 너무 더워서 지하에 있는 마트에서 물을 사야 했다. 물을 들고 막상 계산대에 줄 서 있으니 떨렸다. 하지만 물값보다 큰 금액을 지급하면 알아서 잔돈을 챙겨 줄 거로 생각했다. 예상했던 대로 내가 준 돈을 직원이 조용히 받아서 나머지 잔돈을 말없이 내게 주는 방식으로 계산을 마치고 물을 살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화장실 사용료를 내야 한다? 쇼핑센터에서 선물을 사려고 구경하다가 화장실에 갔다. 그곳에는 청소하는 사람과 중국인 여자 여행객 두 명이 같이 있었다.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중국인들에게 화장실 사용료를 내라는 것 같았다. ‘왜? 화장실 사용료를 내라고 하지?’라고 생각하며 나오는데 그녀가 화를 내며 나에게도 사용료를 내라고 했다. ‘나는 쇼핑센터 물건을 구매한 고객이다. 그래도 화장실 사용료를 내야 하느냐’라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영어로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가지고 있던 동전 두 개를 가만히 내줬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돈을 받아갔다. 쇼핑센터에서 화장실 사용료를 받는다니 이상했다.
기차 여행 중에 유럽에서 화가 났던 일 TOP 3에 드는 사건이 있었다. 두 번째 주말을 맞아 딸과 프랑스 여행을 가기 위해 독일 고속열차를 탔다. 독일 고속열차 이체에(ICE)를 타고 베를린에서 프랑크푸르트에 가서 프랑스 고속열차 테제베(TGV)로 갈아타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노선이었다. 철저하게 시간을 잘 지킬 것이라고 상상했던 독일의 모습과는 다르게 독일의 기차는 정말 정말 엄청나게 무시무시하게 연착했다. 부푼 기대를 안고 기차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랑크푸르트의 전광판이 불티나게 지연을 알리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기차선로에 불이 났는데 그래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모든 열차노선이 꼬이고 지연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기 했다. 우리 모녀가 유럽에 온 첫 여행이라서 기대가 매우 컸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 싶었다.
밤 열한 시가 넘어서 스트라스부스행 막차를 어떻게든 타겠다고 기차역에서 뛰어다닌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독일 열차와 프랑스 열차는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끝까지 승객을 도왔다. 우리가 탄 기차는 5시간이나 연착해서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는 바람에 우리가 예약한 테제베는 떠나버렸다. 시간을 계속 점검하던 딸이 발을 동동 구르다가 대책을 찾기 위해 열차 직원을 찾아갔다. 직원은 오펜부르크라는 독일과 프랑스 국경에 있는 도시까지 다른 기차를 타고 가라고 했다. 오펜부르크에서 국경을 넘는 기차로 갈아타라고 말한 직원에게 연락을 받은 프랑스 기차는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래도 나중에 철도 금액의 50%는 돌려받았다. 우리 모녀가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에 비하면 적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라도 어딘가? 그래도 그날 밤 안으로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호텔에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역 근처 호텔을 예약한 딸의 센스 덕분에 호텔을 새로 잡아야 했거나, 택시를 타야 하지 않은 것도 다행이었다.
이베제가 5시간 연착하는 동안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운 일도 있었다. 우리가 탄 기차는 선로 고장으로 운행을 멈춰서 다른 기차로 옮겨 타야 했다. 그런데 그 기차 특실이 거의 비어있었는데 특실에 앉아도 된다고 했다. 특실 좌석 가운데 테이블도 있고 좋았다. 이왕 늦은 거 어쩌랴~ 어떻게든 될 거라고 마음을 다독이면서 기차 안에서 맛있는 독일 맥주도 마셔 보았다. 원래 낮에 도착해서 기차에서 내려야 했지만, 너무 많이 연착되는 바람에 기차 안에서 노을도 볼 수 있었다. 노을은 말 그대로 눈치도 없이 정말 정말 너무 예뻤다.
독일 사람들은 아무리 기차가 지연돼도 잘 화를 내지 않고 덤덤했다. 독일 사람들이 시간을 잘 지키는 우리 기차를 경험한 후에도 독일 기차를 보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