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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커피 Dec 12. 2022

잘하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늘 아이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당사자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잘하지 않으면 안 괜찮아요. 다른 친구들과 비교도 되고, 나 스스로의 만족감도 떨어집니다. 마음은 불편하고 지금 이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기분도 들죠. 다음에 더 잘해야지 하는 마음과 함께 지금 이 순간이 얼른 없어지기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교사 입장에서 모든 아이들이 일정 수준의 이상의 성취를 얻게 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학년이 높을수록 어떤 활동이든 수준 차이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렇다고 본인이 조금 뒤처지는 활동은 아예 접어버리는 것은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서도 좋지 않습니다. 지금이 내가 살아가는 날 중에 가장 젊은 나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이 제일 수준 차이가 적게 나는 시기라 뒤처지는 부분을 따라잡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소한 포기들이 모여 “수포자”라는 대명사를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말 대신에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까요?


바로 “이 부분을 조금 고쳐볼까?”라고 해주어야 합니다.


미술시간.


수채화를 연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지난주에는 밖에 나가서 원하는 풍경을 골라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채색 시간이었습니다. 물감 사용이 워낙 서투른 아이들이 채색을 멋지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멋지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높습니다. 그래서 조금의 실수와 자신의 미숙한 솜씨를 연습하기보다 포기하려 드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 교사의 시범이 꽤나 효과적이죠. 그날도 아이들 의자에 제가 대신 앉았습니다. 이 부분은 이렇게, 여기는 진하게, 연하게 표현하려면 이렇게... 많은 설명과 함께 나무가 완성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내 설명을 듣고 선생님의 솜씨에 감탄해야 할 아이는 내 옆에 없었습니다. 그림의 주인은 저 멀리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나는 아이에게 수채화 그리는 법 이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아이의 자리에 앉아 대신 그림을 시범 보이는 것으로 아이에게 많은 말을 한 셈이었습니다. 


너는 그림을 못 그려.

이렇게 하면 안 돼.

이게 잘하는 거야.


자신의 작품을 선생님에게 맡긴 채 멀리서 수다 삼매경에 빠진 아이를 보며 순간 욱하고 감정이 올라왔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보면 아이를 그림에서 도망가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저였습니다. 


완성된 그림은 어땠을까요. 


그림은 멋있었고, 아이는 그림이 바닥에 떨어져도 줍지 않았습니다. 


채색이 서툰 아이에게 붓을 대신 잡아주는 화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이 부분에는 이 색으로 점점 진하게 색칠해보세요,라고 이야기해주는 길잡이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요. 스스로의 힘으로 완성한 그림이었다면 바닥에 떨어진 그림을 주워 먼지를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 일이 있은 후로는 아이들을 대신해서 그림을 그려주지 않습니다. 대신 자세하게 어떻게 하면 더 완성도 있는 그림이 될 수 있을지 이야기해주려고 노력합니다.


테두리를 하면 그림이 더 또렷할 것 같은데?

여기는 좀 더 진한 색이 어울리지 않을까?

이 부분은 조금 더 크게 그려볼까?

여기는 노란색보다 흰색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고학년일수록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이야기해주려고 애씁니다. 얼른 작품을 마무리하고 딱지를 치려는 아이들도 내가 건네는 꼼꼼하고 정성스러운 한마디에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물론 부작용도 있습니다. 너무 세세하게 하나하나까지 나와 의논하여 작품을 완성하려는 아이도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더라도 질문을 다 받아주고 함께 의논해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면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가다 보면 질문의 횟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들은 게시판에 모두 걸어 소중하게 감상해야 합니다. 같은 주제의 작품을 여럿 걸어놓으면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작품이 됩니다. 서로의 작품이 비교가 되기보다 각각의 특색을 느낄 수 있고 함께 어우러지는 조화로움도 함께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힘으로 완성한 작품이 멋지게 전시된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큰 성취감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여기서 아이들이 그림을 스쳐 지나가듯 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감상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사의 노력이 한 스푼 필요합니다. 그 한 스푼의 노력은 교사가 툭 던지는 한마디입니다.


어, 이거 진짜 색감이 멋진데?

이거랑 이거는 비슷한 듯 달라.

지난번보다 훨씬 완성도가 좋아졌는데?


이러한 교사의 말 한마디는 아이들을 적극적인 감상자로 만드는 마법 같은 주문입니다. 교사의 한마디에 아이들은 작품을 조금 더 섬세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보는 것도 습관입니다. 자세히 보는 습관은 그림을 보는 안목을 길러주는 데에 큰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끈기 있게 살펴보는 자세를 배웁니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교육과정과 평가가 중요하다고들 합니다. 요즘 핫한 오은영 박사님께서도 금쪽이를 기르는 부모들에게 "과정"이 남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미술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이 “과정” 자체가 아이들의 삶을 빛나게 해 줄 하나의 작품이 되어주지 않을까요. 오늘도 제가 좋아하는 미술시간에 아이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빛나게 해 줄 작품이 하나 완성되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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