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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커피 Dec 19. 2022

'누구'의 교실

언젠가 싹을 틔울 그 '씨앗'을 위하여

저는 청소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좋아한다기보다 지저분한 것을 못 견디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아이들이 하교한 빈 교실, 업무를 처리하려 책상에 앉으면 아이들이 제대로 정리해 두지 않은 책상, 바닥의 쓰레기와 먼지들이 눈에 거슬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청소를 대충이라도 하고 난 다음에야 일거리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바닥의 얼룩도 깨끗하게 닦고 구석의 먼지도 쓸어내는 청소다운 청소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유난히 지저분한 자리들이 눈이 띕니다. 바닥은 본연의 색을 잃고 연필심과 각종 필기구들의 얼룩으로 가득합니다. 서랍 속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화산 같습니다. 서랍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책들의 모서리는 주변의 분위기를 맞추기라도 하듯 하나같이 너덜너덜합니다. 저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최소한의 정리를 해줍니다. 밖으로 나와 있는 것들은 안으로 넣어주고 바닥의 얼룩은 닦고 책상을 바르게 놓아봅니다.


제가 정리한 교실은 정리하기 전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등교하는 아이들은 교실이 깨끗해졌는지, 자기 물건이 정리되어있는지 도통 알지를 못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 그런지, 아이들이 하교하고 난 교실을 정리하는 일이 종종 번거롭고 힘든, 커다란 일로 다가옵니다. 교실 정리 이외에도 할 일들이 태산같기 때문에 얼른 다른 일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하지만 저는 급한 회의가 잡히지 않는 한 아이들이 하교하고난 후에는 꼭 교실 정리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작품 게시판도 자주 바꾸고 때에 따라 아이들에게 필요한 자료들도 게시해 둡니다.


얼마 전에는 연말을 맞아 칠판 옆에 자리를 마련하여 벽걸이 트리를 만들었습니다. 전구도 달아주고 여러 장식도 달고 크리스마스 가렌더도 달아두었습니다.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이 참 마음이 포근하였습니다. 다음날 이것을 보고 기뻐할 아이들의 모습이 기대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이들의 반응은 저의 기대처럼 반짝였습니다. 너무 예쁘다며 반짝이는 전구를 한참 바라보기도 하고, 트리 장식을 고물고물 한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였습니다. 각자 트리를 만든 이야기들을 나누고 서로 예쁜 트리를 본 기억들을 끄집어내며 조잘거렸습니다.


하지만 그 반짝이던 호기심이 사그라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정말 짧았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장식이 망가지기도 하고, 망가진 장식이 밟혀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기껏 열심히 준비한 트리가 천대받는 기분은 썩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왕 연말 분위기를 내려고 마음먹었으니 작품 게시판도 좀 분위기를 바꿔보았습니다.


미술시간.


아이들과 함께 눈송이 장식을 만들어서 뒤판을 겨울 느낌이 물씬 나도록 꾸밀 계획이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눈송이를 보여주자 아이들의 탄성이 들렸습니다.


우와. 예뻐요!


자, 그럼 우리가 직접 한번 만들어보자!


그런데 곧 아이들의 탄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습니다. 코로나를 겪는 2년의 시간이 아이들의 조작활동 발전을 방해했을까요. 참 쉽다고 생각했던 만들기가 아이들에게 너무 어려웠나 봅니다. 아이들이 시간이 많이 남아 많이 만들 것이라고 예상하여 여러 가지 종이를 준비했는데, 준비한 종이의 반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를 완성한 아이들은 힘들다며 두 개는 만들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만든 가지각색의 눈송이로 뒤판을 뒤덮으려던 나의 계획이 파사삭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힘들다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서 겨우 미술시간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완성한 눈송이들은 뒤판을 장식하기에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얼기설기 붙이고 나니 너무 엉성해 보이더군요. 다음 미술시간을 활용해서 이 뒤판을 어떻게든 잘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음날.


등교한 아이들은 뒤판에 붙은 자신들의 작품을 보고 너무도 감탄하였습니다.


선생님, 너무 멋져요!


엥?


참 의외였습니다. 내가 보기엔 어설프기 짝이 없는데 아이들은 너무도 만족한 눈빛으로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 틈틈이 자기가 한 작품을 찾아보기도 하고, 친구들의 작품들 자세히 들여다보며 '우와~' 탄성을 내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나면 손을 좀 봐야겠다는 계획을 조금 미뤄두기로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뚝딱 만든 멋진 트리 Vs 아이들이 고생해서 만든 어설픈 눈송이


아. 이 당연한 걸 잊고 살았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정성이 들어간 것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것을요. 자신의 노력과 정성이 들어간 것. 그것이 바로 <나의 것>이 되는 씨앗이라는 걸요.


내가 원해서 나 혼자 청소한 교실 나 혼자 감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요.


아이들이 문제의식을 느끼고 해결방법을 찾고 함께 노력한 과정들이 없는 <깨끗한 교실>은 아이들에게 더 이상 <나의 교실>이 아닌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청소하고 노력한 결과를 살펴보는 과정 없는 그저 깨끗한 교실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어주지 못했던 겁니다. 서투르지만 아이들의 손길이 닿은 교실, 그 교실이 바로 아이들이 주인인 교실이 되는 거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 아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작품을 아름답게 감상하고 있고, 허전한 공간에는 삐뚤빼뚤한 소원 양말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습니다. 아이들은 친구들의 소원들을 살펴보며 키득대기도 하고 반듯한 마무리를 한 친구 작품을 보고 부러운 눈길을 한번 보내기도 합니다.


망가진 트리와는 다르게 눈송이와 소원 양말은 하나도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신들이 주인인 공간을 소중히 다루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작품 게시판을 벗어나 교실의 모든 공간을 아이들이 주인인 공간으로 만들어주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주인인 이 교실에서 저마다 다른 씨앗을 마음에 품게 될 것입니다. 그 싹이 언제 어디에서 싹을 틔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그 씨앗의 종류가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씨앗들이 언젠가 싹을 틔워 아이들의 삶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실에서 보내는 오늘 하루는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고 감격스러운 과정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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