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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나 Aug 22. 2023

[희곡] 내 할머니의 결혼식(1)

나오는 사람


문  식     세진의 아버지

세  진     문식의 딸. 교사

빛  나     세진의 제자. 학생               


     


현재, 여름     

               

장소     


벤치가 있는 공원                                   



 1     


 공원.     

 빛나가 공원 한쪽 풀숲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초록색 이파리에 붙어 있던 달팽이를 억지로 떼어내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장난을 친다.

 통화를 마친 세진이 다가오자 빛나는 콘택트렌즈 통 안에 달팽이를 급하게 숨긴다.

 빛나, 벤치로 와서 앉고 그 곁으로 세진이 다가온다.     


세  진 미안. 통화가 좀 길었지. 우리 아빠 잔소리 엄청 심해. 아직도 날 어린애 취급한다니까. 

빛  나 쌤은 아빠한테 반말을 쓰네요.

세  진 어릴 때부터 습관이 돼서. 

빛  나 다 큰 어른이 그러는 거 신기해요.

세  진 고쳐야 하는데 잘 안 되네. 

빛  나 왜 고쳐요?

세  진 남들 보기 좀 그렇잖아.

빛  나 남들이 뭔 상관이에요? 아빠랑 쌤만 좋으면 됐지.

세  진 그런가. 넌 아빠한테 안 그래?

빛  나 전 아빠랑 안 친해요.

세  진 그렇구나. 요즘은 딸바보가 대세던데.

빛  나 우리 아빤 그냥 바보 같던데.

세  진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빛  나 내가 반말하면 가만히 안 둘걸요?

세  진 아버지가 예의범절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나 보네.

빛  나 예의는 지랄. 우리 오빠한테는 안 그래요.

세  진 정말?

빛  나 아빤 오빠만 예뻐하거든요. 나는 늘 벌레 보듯이 하고.

세  진 이상하네. 이렇게 예쁜 딸한테 왜 그러실까.

빛  나 몰라요. 재수 없어. 꼰대.

세  진 어?

빛  나 들었으면서 왜 못 들은 척해요?

세  진 잘 못 들었어.

빛  나 거짓말.

세  진 진짜야.

빛  나 내가 뭐 하나 말해줄까요? 쌤은 거짓말하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요.

세  진 어떻게?

빛  나 아랫입술이 미세하게 떨려요.

세  진 진짜?

빛  나 몰랐어요?

세  진 응.

빛  나 원래 사람은 자기 자신은 잘 못 보는 법이니까.

세  진 넌 가끔 보면 열일곱 같지가 않아.

빛  나 저도 또래 애들이랑은 수준이 안 맞아요.

세  진 애늙은이 같다는 소리였는데.     


 빛나, 세진의 농담에 웃는다.     


빛  나 아빠랑 친한데 같이 살지 왜 자취를 해요?

세  진 음…… 진짜 어른이 되고 싶어서? 제대로 된 정말 어른 말이야.

빛  나 아빠가 무조건 지지해주셨어요?

세  진 말도 마. 처음 자취한다고 했을 때 우리 아빠 장난 아니었어. 도시락 싸 들고 쫓아다녔다니까. 그 도시락을 날 먹여가면서 말렸지만. 지금은 거의 포기 반, 인정 반 그런 상태.

빛  나 아빠하고 친한 딸들은 딱 보면 티가 나요.

세  진 어떻게?

빛  나 예뻐요. 거침없이 당당하고 자기를 무진장 사랑하거든요.

세  진 뭐야. 딱 니 얘기잖아.     


 빛나, 세진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다.     


빛  나 쌤. 사람 볼 줄 모르죠?

세  진 어머, 아니야. 내가 얼마나 사람을 잘 보는데. (곧 인정하며)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나?

빛  나 암튼 부럽다.

세  진 뭐가 그렇게 부러운데?

빛  나 아빠랑 친한 것도, 혼자 자취하는 것도, 진짜 어른인 것도 모두 다.

세  진 요즘 고민이 많구나.

빛  나 고민 없는 청소년도 있어요?

세  진 그런가.     


 빛나, 공원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운동화 끝으로 땅을 툭툭 찬다.     


빛  나 우리 아빠 누군지 알아요?

세  진 얼마 전에 들었어, 애들한테. 

빛  나 아무튼 이 학교는 비밀이 없어요. 소문 하난 진짜 빠르다니까.

세  진 학교에 와서 교장 선생님 만나고 가셨다며.

빛  나 쌤. 이번 선거 때 절대 그 사람 찍으면 안 돼요.

세  진 왜?

빛  나 그런 사람이 정치하면 이 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위험해질 거예요.

세  진 엄청 젠틀하고 스마트해 보이시던데?

빛  나 진짜 사람 볼 줄 모른다. 그거 이미지메이킹 한 거예요. 다 만들어낸 거라고요.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 웃음, 행동 그거 다 구라거든요. 서민을 위한 정치? 웃기고 있네. 지하철 요금이 얼만지도 모르는 주제에. 쌤…… 설마 선거 때 후보 생긴 것만 보고 투표하고 그러는 사람 아니죠?

세  진 나 지성인이야. 지난번 티브이 토론회 때 보니까 그렇게 안 보이던데. 공약도 괜찮고.

빛  나 답답해. 다 대본대로 하는 연기고 쇼라고요.

세  진 아빠한테 쌓인 게 많은 보구나.

빛  나 존나 가식적인 인간을 싫어할 뿐이거든요. 전 투표권이 없잖아요. 저 대신 소중한 한 표를.

세  진 사춘기 땐 그럴 수 있지. 나도 학교 다닐 땐 아빠랑 엄청나게 싸웠어.

빛  나 암튼 찍지 마요. 절대.     


 세진, 빛나와의 대화에 피식 웃으며 말을 돌린다.     


세  진 딴 얘기 하자.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빛  나 영화요. 보셨어요?

세  진 그때 추천해 준 그 영화. 괜찮더라.

빛  나 입술이요.

세  진 입술 뭐?

빛  나 또 떨려요.

세  진 미안.

빛  나 미안할 것까진 아니고. 쌤은 그런 스타일 영화 별로 안 좋아하죠?

세  진 아냐. 좋아해.

빛  나 구라.

세  진 내가 많이 바빴어.

빛  나 이것도 구라.

세  진 솔직히 말하면 보다 말았어. 조금 불편하더라. 팝콘 먹으면서 편하게 볼만한 영화는 아니잖아? 넌 그 영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빛  나 그거 은근히 유명한데. 빨간 안경 쓰고 다니는 기자 아저씨 알죠? 그 아저씨가 별 다섯 개나 줬잖아요. 칸 영화제도 가고 그랬는데.

세  진 아 그래? 난 왜 몰랐지? 나 대학교 때 영화 동아리였거든. 왕년에는 내가 말이야 극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는데 말이야. 그놈의 임용 시험이 뭔지 영화 한 편을 맘 놓고 볼 시간이 없어요.

빛  나 쌤은 좀 다를 거라 기대했는데.

세  진 다르다니?

빛  나 나하고 말이 좀 통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세  진 그 영화가 왜 그렇게 좋아?

빛  나 특별하잖아요.

세  진 너는 그 사람들이 그러는 게 이해가 되니?

빛  나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세  진 아름답다…….

빛  나 그 영화 말이에요. 작가의 실제 경험담이래요.

세  진 그럼 작가가 레즈비언이야?

빛  나 정확히 말하면 레즈비언 성향을 가진 양성애자인 거죠.

세  진 뭐가 그렇게 복잡해?

빛  나 원래는 소설이었는데 영화로 각색한 거예요. 그 책이 쓰인 게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이었거든요? 그때는 동성애가 정신병으로 취급당했대요.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도 말이에요.

세  진 너 영화 잡지야 뭐야? 맞다. 꿈이 영화감독이랬지?

빛  나 기억하네요?

세  진 물론이지.

빛  나 암튼, 그 작가는 자기가 가진 동성애 성향을 치료받고 싶었나 봐요.

세  진 그랬겠다. 정신병으로 취급받을 정도였으니 살기 힘들었겠지.

빛  나 그래서 심리치료 비용을 마련하려고 일주일에 두 번 백화점 장난감 가게에서 알바를 해요. 그런데 거기서 두둥! 모피코트를 입은 매력적인 여성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거죠.

세  진 직접 영화 보는 것보다 니가 해주는 이런 얘기가 더 재밌다.

빛  나 그래요? (더 신나서) 그 작가 취미가 뭐였는지 아세요?

세  진 뭐였는데?

빛  나 달팽이 집사였대요.

세  진 우엑.

빛  나 무슨 반응이에요?

세  진 징그러워. 끈적거리고 흐물거리잖아.

빛  나 요즘은 반려동물로 키우는 사람도 많은데.

세  진 난 사양할래. 상상만 해도 끔찍해. 그래서 달팽이 집사는 어떻게 됐는데?

빛  나 파티가 있을 때면 달팽이 백 마리가 든 가방을 들고 가서는 테이블 위에 달팽이를 꺼내 놓고 사람들을 놀래키곤 했대요.

세  진 엄마야, 나 소름 돋은 것 좀 봐,     


 세진, 일어나 온몸을 긁어대기 시작한다.

 빛나, 그런 세진을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빛  나 달팽이가 자웅동체인 건 아시죠? 

세  진 그 정도는 기본이지. 나도 학교 땐 공부 좀 했어, 왜 이래. 생물 시간에 배우잖아. 달팽이. 달팽이과에 속하는 연체동물. 암컷과 수컷이 한 몸에 있다. 달팽이가 서로 짝짓기를 할 때는 자기 몸에 있는 암수 중 하나만 선택한다. 짝짓기가 끝나면 다시 원래의 자웅동체로 돌아온다. 그런데 왜 하필 달팽이를 키웠을까?

빛  나 자기가 달팽이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달팽이의 단단한 껍데기가 부러웠거나.

세  진 껍데기가 왜 부러워?

빛  나 달팽이는 그 껍데기 속으로 언제든지 숨을 수 있잖아요. 사람들이 얼마나 손가락질하고 비난했겠어요.

세  진 그랬겠지. 아마도.

빛  나 닮고 싶어요.

세  진 그 작가?

빛  나 달팽이요. 단단한 껍질을 가진 사람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잖아요.

세  진 아무래도 그렇지.     


 빛나, 세진의 표정을 살피더니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다.     


빛  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  진 달팽이?

빛  나 그런 사람들이요. 바이섹슈얼.

세  진 글쎄. 나랑은 너무 상관없는 이야기라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네.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아예 없어.

빛  나 진짜요? 

세  진 그런 애들은 있었다. 나 여고 나왔거든. 왜 그런 애들 있잖아. 여잔데 남자같이 하고 다니는 애들. 머리 짧게 자르고, 옷도 크게 입고, 여잔데 여자한테 인기 많은 애들. 학교에 한 명씩은 꼭 있었지. 너 주변엔 그런 사람 없어? 바이… 바이 뭐라고?

빛  나 저는…….     


 빛나, 무언가 말하려는 듯 머뭇거린다.     


세  진 있다, 있어! 걔네! 걔네 있잖아. 그 친구들 어떻게 됐니? 3반 여자애들. 반장이랑 부반장이었던가?

빛  나 걔들 전학 간대요.

세  진 결국 그렇게 됐구나.

빛  나 학부모들 민원이 장난 아니래요. 반장은 지방으로 이사 간다는 소리도 있던데.

세  진 이사까지 갈 필요 있나.

빛  나 걔네 엄마 성격에 자기 딸 레즈라고 소문난 동네에선 못 살 거예요.

세  진 내 기억엔 성실하고 착한 애들이었는데.

빛  나 이상해요. 방송반 애들 사건 땐 정학으로 끝났는데 걔들은 퇴학이라니.     


 세진과 빛나, 한동안 말이 없다.     


빛  나 방송실에서 그 짓 하다 걸린 남녀커플 애들은 일주일 정학으로 끝났잖아요. 3반 애들하고 뭐가 다른 거예요? 여자애들끼리 키스하는 건 잘못된 일이고, 남녀 간에 섹스는 자연스러운 거예요?     


 세진, 아무 대답도 해주지 못한다.     


세  진 어…… 나는 모든 인간은, 누구나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고 사랑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빛  나 그런 교과서에 나온 말 말고. 개인적인 쌤의 생각이 궁금한 건데.

세  진 그러니까 나는 말이야. 솔직히 잘 모르겠어. 뭐가 좋다 뭐가 나쁘다 말하기가 좀 그래. 일단 나한테 피해를 주는 건 아니니까 자기들끼리 좋아하는 게 나쁜 건 아닌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그걸 무조건 찬성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 일단 나는 교사니까 말이야. (결심한 듯 말한다) 에이, 그냥 좀 불편해. 나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니까.

빛  나 다른 사람들이라고요?

세  진 그렇지 않나?

빛  나 걔들도 쌤을 불편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자기들하고 쌤은 다른 사람이니까?    

 

 세진, 분위기를 전환하려 애쓴다.     


세  진 원래 그 나이대 여자애들 한 번쯤 그런 생각 해보잖아? 사춘기 땐 여자친구들끼리만 붙어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까 자기가 그런 성향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어. 넌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던 거 같거든. 학창 시절에 친구한테 느끼는 감정을 진짜 심각하게 생각하고 말이야. 근데 지나고 나면 사실 그 감정이 그런 게 아니거든. 아마 대학 가면 3반 걔들도 동성보다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그러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또 달라지고.

빛  나 정말 그렇게 될까요?

세  진 그래. 졸업하면 또 달라져. 아직 니네 나이가 성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잖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 그런 거 그거 다 한때야, 한때.

빛  나 한때…….

세  진 다 지나간다니까.

빛  나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세  진 뭐가?

빛  나 아니에요. (가방에서 대본 꾸러미를 꺼내며) 이거 읽어봐 주실래요? 제가 이번에 쓴 건데 청소년 영화제 내보려고요.

세  진 너 시나리오도 직접 쓰니? 대단한데?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이런 거까지 쓰는 거야?     


 세진, 빛나에게 받은 시나리오를 한참 쳐다본다.     


빛  나 상금이 꽤 세더라고요. 이제 가야 해요. 아빠가 선거 끝날 때까지는 집에서 꼼짝도 말랬는데. 오늘도 몰래 나왔거든요.

세  진 그래. 얼른 들어가 봐.

빛  나 오늘 상담 고마워요, 쌤.

세  진 나도 재밌었어. 방학 잘 지내고 학교에서 보자.

빛  나 쌤도요.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세진이 빛나를 부른다.     


세  진 참! 버스 타지 말고 전철로 가. 오늘 그쪽 버스 안 다녀. 거기 광장에서 도로 다 막고 축제 한대.

빛  나 축제요?

세  진 그런 축제 있잖아. 퀴어문화축제랬나? 그런 걸 꼭 사람들 많이 다니는 광장에서 해야 되나? 어린 애들도 지나다니면서 다 볼 텐데 말이야. 자기들끼리 좋아서 하는 거면 저기 지방 같은 데서 조용히 할 것이지.

빛  나 방금 전에 모든 인간은 존중받고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면서요. 이런 발언은 차별 아니에요?

세  진 아까 여기 올 때 교통 통제되는 바람에 되게 불편했거든. 그래서 열 좀 받았어.

빛  나 저 진짜 가요. (가려다 말고) 그런 사람들 말이에요. 원래 그렇게 태어난 걸까요? 아니면 살다 보니 그렇게 변해버린 걸까요?    

 

 세진, 빛나의 질문을 이해 못 하는 눈치다.

 빛나, 세진에게 다가온다.     


빛  나 쌤, 손 좀 펴보세요.     


 빛나, 렌즈 통 안에 들어 있던 달팽이를 꺼내 세진의 손 위에 내려놓는다. 세진의 손바닥 위에 놓인 달팽이. 세진, 깜짝 놀라 달팽이를 털어낸다.     


세  진 놀랐잖아. 이게 뭐야.

빛  나 깜짝 선물이었는데. (달팽이 보고) 많이 아팠겠다.     

 빛나, 바닥에 떨어진 달팽이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린다.     

빛  나 정말이네. 이렇게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도 안 깨졌어. 진짜 이 단단한 껍질 때문인가 봐요.     


 빛나, 달팽이를 풀숲 쪽에 가져다 둔다.     


세  진 (미안한 마음에) 시나리오 이거, 꼭 읽어볼게.

빛  나 네.     


 빛나, 인사하고 나간다.     


 세진, 달팽이가 손바닥에 남긴 감촉의 여운이 남는지 몸을 움츠린다.

 양손에 짐을 잔뜩 든 문식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다.     


문  식 먼저 들어가 있지 않고.

세  진 주인 없는 집에 먼저 들어가 있는 건 예의가 아니지.

문  식 이럴 때 보면 세상 정떨어져. 저 집이 남의 집이야?

세  진 이제 내 집은 아니잖아? (문식의 짐을 받으며) 뭘 이렇게 많이 사와?

문  식 오랜만에 오는 딸 대충 먹여 보내?

세  진 무슨 중대발표길래 집까지 오래 그냥 전화로 말하지.

문  식 전화로 대충할 말이면 진작했지. 집에 좀 자주 와. 이런 거 아니면 이젠 딸 얼굴도 못 보는 거야?

세  진 뭔데? 무슨 얘긴데 이렇게 뜸을 들여. 그냥 말해.

문  식 저녁 먹으면서 말할 거야.

세  진 아 답답해서 숨넘어가. 지금 말해. 당장 말해. 안 그럼 나 밥 안 먹어.     


 세진, 문식을 억지로 벤치로 앉힌다.

 문식의 입가에서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온다.     


세  진 어허. 아빠 좀 이상해.

문  식 뭐가 이상해?

세  진 왜 그래 뭔데 그래?

문  식 너 아직도 혼자 맞지?

세  진 나 혼자 맞지. 외동인 거 티나?

문  식 너는 누굴 닮아서 그렇게 위트가 부족하냐. 그런 얘기가 아니라 솔로냐 이 말이야. 애인 아직 안 생겼지?

세  진 나 밥 안 먹을래. 그냥 간다.     


 세진, 갑자기 일어나 집 반대 방향으로 몸을 튼다.     


문  식 야, 어딜 가?

세  진 안 해. 나 안 해. 나는 선 같은 거 안 본다고.

문  식 오버하지마. 그런 얘기가 아니야. 그리고 너는 애가…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선이 웬 말이냐.

세  진 그럼 남자친구 얘긴 왜 물어보는데.

문  식 이런 모질이. 아이고 반푼이. 뭐하냐 너는. 그 나이 먹도록 연애도 안 하고.

세  진 아빠 자꾸 이럴래?

문  식 잘 들어라. 우리 집안 큰 경사 치를 거 같다. 인륜지대사.

세  진 우리 집안 누구? (크게 놀라며) 아빠? 아빠 결혼하려고? 마음에 드는 아주머니라도 생긴 거야? 진짜? (문식의 손을 잡으며) 그래. 잘 생각했어. 하늘에 있는 우리 엄마 이젠 좀 쉬게 해주자. 맨날 아빠 걱정하느라 잠도 편히 못 잘 텐데. 그래서 누군데? 양 권사님? 아니면 혹시…… 둘리분식 사장님? 맞지 미영 이모.

문  식 너는 참…… 사람 볼 줄을 몰라. 그래서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냐. (자신의 행색을 가리키며) 이게 연애하는 사람 몰골이냐?

세  진 맞네.

문  식 나 말고.

세  진 그럼 누구? 답답해 빨리 말해.

문  식 우리 엄마.     


 정적이 흐른다.     


문  식 니 할머니.

세  진 할머니? 성북동 친할머니?

문  식 성북동은 왜 갖다 붙여? 니가 할머니가 둘이야 셋이야?

세  진 할머니가 결혼을 한다고? 결혼? 우리 할머니가?

문  식 몇 번을 물어봐?

세  진 아니 누구랑?

문  식 누구랑 하긴 누구랑 해? 사람이랑 하지?

세  진 오늘 만우절이야? 아닌데. 혹시 이거 몰래카메라야?

문  식 야. 샘 안 나냐? 넌 한 번도 못 해본 걸 할머니는 두 번이나 하시는데.

세  진 나이 80에 결혼을 한다고?

문  식 결혼에 나이가 어딨어. 좋으면 하는 거지.

세  진 황당하네. 아빠는 만나 봤어, 그 결혼하실 분?

문  식 당연히 봤지.

세  진 어떻게 된 거야? 어디서 만나신 거래? 어떤 사람이래?

문  식 정신없어. 하나씩 물어봐.

세  진 빨리 얘기 좀 해봐.

문  식 할머니 구청 문화센터에 시 배우러 다니는 거 너도 알지?

세  진 알지.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나가셨잖아.

문  식 거기서 만나셨대.

세  진 우리 할머니 능력자네.

문  식 그렇지? 주름에 가려져서 그렇지 우리 엄마가 얼마나 반듯한 얼굴이라고. 아빠가 할머니 꼭 빼닮았잖아. 듣고 있는겨?

세  진 시 배우러 다니시는 양반이면 사는 형편은 괜찮으신가 보네. 건강은? 우리 할머니가 그 연세에 노인네 수발들어야 하는 거 아니지?

문  식 나이 80에 건강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관절 불편하신 거 빼고 지병은 없으시대.

세  진 그쪽 가족들은 만나봤어? 이상한 사람들하고 잘못 엮이는 거 아냐? 드라마 보면 나오잖아 왜. 재산 보고 달려드는 인간들.

문  식 혈혈단신. 엮일 만한 가족 친지 하나 없더라.

세  진 상처(喪妻)하셨나 보구나.

문  식 그건 아니고. 내가 알기론 아예 처음부터 처가 없었지 아마.

세  진 독신?

문  식 그렇지. 평생을 혼자 지내셨대.

세  진 와. 최근에 들은 소식 중에 제일 쇼킹하네. 아니 근데 왜 이제야 말해줘. 결혼 얘기 오고 간 거면 그래도 꽤 됐다는 얘긴데. 섭섭하네 정말.

문  식 그래서 지금 하잖아. 집에 한 번 오랄 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져나간 게 누구더라.

세  진 그건 공부한다고. 그런데 아빠 결혼을 꼭 해야 해? 그냥 두 분이서 같이 사시면 되잖아. 그 연세에 결혼식이 큰 의미가 있을까?

문  식 나이 먹어도 사람은 다 같은 거야. 젊은 사람들한테 의미가 있는 거면 노인들한테도 똑같은 거라고. 늙으면 좋은 의미도 같이 희미해질까 봐?

세  진 그런 말이 아니고.

문  식 아빠가 제대로 식 올리자고 그랬어. 니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시집올 때 결혼식이 다 뭐야… 한복 한 벌 못 얻어 입으셨대. 기왕 하는 결혼식 멋지게 해드릴 거야. 예식장도 좋은 데로 잡고, 일가 친척들한테 연락 싹 돌려서 말이야. 참, 대구 가는 전세버스도 알아보려고 그런다.

세  진 두 노인네 예식 때 입장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라나 몰라.

문  식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촬영 나올지도 모르지?     


 문식, 이야기하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맴돈다.     


세  진 아빤 뭐가 그렇게 좋아?

문  식 갑자기 효자 된 것 같아 그런다.

세  진 할머니 결혼시켜 드리는 게?

문  식 아빠가 어렸을 때 할머니 속 엄청 썩인 거 알지?

세  진 할머니 반지 훔쳐서 몇 달씩 집 나가고 그랬다면서. 왜 그랬어?

문  식 나도 몰라. 철이 없었어. 이제야 철이 좀 드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처음으로 효도다운 효도 한번 해보려고 그런다. 큰 건 아빠가 다 준비 할 테니까 작은 건 니가 좀 도와줘. 마침 방학이니까 시간 좀 되지?

세  진 돕는 거야 어려운 건 아닌데. 내가 뭘 도울 수 있을까?     

 문식, 옷 안쪽에서 명함 하나 꺼내 세진에게 건넨다.     

문  식 여기 한복이 요즘 청담동에서 제일 유명하대. 당장 두 분 모시고 여기 좀 다녀와. 돈 아끼지 말고 제일 고급으로 해드려. 부탁한다.

세  진 알았어요.

문  식 (일어나며) 덥다. 들어가. 수육 좀 삶고 시원하게 콩국수 말아먹자.     


 문식, 집 쪽을 향해 먼저 걸어간다.

 명함을 받아든 세진, 아직 어이가 없고 당황스럽다.     


세  진 아빠, 같이 가.    

 

 세진, 아빠를 따라가다 멈춰서서 달팽이가 있는 자리 쳐다보고 나간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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