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벗이다-
“청소년 자해, 자살 시도 급증. 약물, SNS 대책 시급하다 “ (한겨레 2026-3/31, 27p 사설)
나도 사설 내용에 동감하지만 대책이라는 것이 누구를 위함인지 아리송하다. 소위 기성인들이 느끼기에 지금 아이들이 ‘천방지축‘, 과 ’ 구제불능‘ 속에 삶이 넘어지고 있으니 탄식할 노릇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몇몇 아이들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망대해 한가운데 떠 있다. 호명만으로는 뒤돌아 서게 할 방법조차 없다. 곧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끔찍한 후회를 하겠지만 원상복귀는 어림도 없는 신화일 뿐이다. 그 진리를 또박또박 알려 준다 해도 아이들에게는 금지와 강요일 뿐이다. 그것은 인생 걸음마를 뗀 정도의 아이들에게 마라톤 대회 출전을 압박하는 것과 같다. 나이만 어른인 자들의 만족감을 위해서. 어른들은 아이들의 결박을 풀어 주어야 한다. 기어 다니기만 했던 세상에서 일어나 걷게 된 삶의 대전환기를 몸소 체험하도록 말이다. 또한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는 예미한 감각을 발달시켜 줄 필요가 있다. 그 바람은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만한 힘을 갖고 있지만 아이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재해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청소년이었고 아팠고 외로웠고 고장 나버린 자전거처럼 나아가는 것이 고달팠다. 내가 살아왔던 시절에도 지금 아이들만큼이나 제정신이 아니었다. 격세지감을 경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삶의 지혜가 시급했다. 수없이 반복되는 문제 발생이 아이들에게 주홍글씨가 되고 있다. 단편적이고 미숙한 실수에 회생 불가능한 형벌을 가하고 있는 셈이다. 고약하고 거친 어른들로부터 아이들은 사냥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갖고 있는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 가능성과 창의성을 빼앗고 희망을 파괴시켜 버리고 있다. 아이들에게 아이들 삶을 다루어 줄 ‘something‘ 이 절실하다. 그것이 대책으로 명명되는 것은 옳지 않다. 대책은 대비하고 수습하기 위한 계획이다. 그것만으로 아이들 삶이 변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들이 사회적 관계에서 즐거움과 따뜻함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눈을 맞추고 정서를 공감할 수 있는 벗을 사귀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