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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후 Oct 03. 2023

나는 0개 국어를 할 줄 압니다.

발표의 무한루프와 부족한 내 영어실력

아침에 진이 문자로 학교 끝나고 픽업이 가능한지 물어봤다. 할 일이야 쌓여있지만 일단 나도 집에 가서 밥은 먹어야 하니, 진과 만나기 전에 시간이 남아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진은 학교에서 일하는 개발자이다. 꽤 경력이 길다 보니 신입들 심사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일은 집에서 하고 가끔 미팅이 있을 때만 학교에 오곤 한다. 룸메들이랑 같이 식사하거나 거실에 있으면 가끔 진이 일이 힘들다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다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곤 한다. 


대부분의 집안 정리는 내가 도맡아서 하는 편이다. 애들이 안 한다기보다는 그냥 너저분하게 있는 꼴을 내가 보지 못한다. 뭔가 집이 지저분하고 설거지거리가 쌓여있으면 짜증이 난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청소는 나의 일과가 되어버렸는데 누군가의 셰이커볼이 disposal에서 "까꿍"하고 있었다. 애들한테 사진을 보내니, 진이 나중에 자기가 뺀다고 해서 나는 부랴부랴 사무실로 향했다. 나중에 메시지가 오길 "어렵게 뺐으니 앞으로 조심 좀 해줘."라고 왔는데, 마치 내가 그러지도 않았는데 내가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범인은 라이언이었다.)

누구야 이 망할 자식

아무튼 오늘은 미국 박사생의 발표와 피피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솔직히 나는 공과 계열이다 보니, 비즈니스 계열보다는 발표와 토론이 상대적으로 적을 거라고 예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달 있는 콘퍼런스, 세미나 발표와 전공 안에서 매주 있는 발표들을 하고 있으면 내가 발표를 하려고 박사를 시작했나 싶기도 하다. 발표가 많다는 것은 피피티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거와 같다. 문제는 시간 안에 알찬 피피티를 만들어서 발표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게 막상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피피티를 만드는 재능이 없다. MOS master이건 다른 관련된 자격증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미적 재능이 없다. 미적 재능을 높이고자 미술 학원까지도 다녔지만 아직도 내가 그리는 사람 그림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그렇기에 피피티를 이쁘게 만드는 건 진작에 포기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로운 발표 자료를 만들어내다 보니, 이제는 이쁘지 않더라도 체계적으로 피피티를 만들어내고 있다. 내 멘토인 서울대 박사형도 내 피피티를 보곤 "야 너무 잘 만들 필요 없어, 시간 지나면 귀찮아서 대충 만들어."라고 할 정도로 칭찬을 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 형은 중국어를 한 달 만에 깨우치는 평범한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의 겸손해 보이는 저 말을 다 믿어서는 안 된다. 참고로 겸손 괴물인 그는 현재 삼성에 있다.


사실 내가 발표와 피피티가 많다고 찡찡대는 것 같지만 자업자득인 셈이다. 왜냐하면 내가 발 벗고 나서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 덕분에 발표에 대한 연습을 해왔고 발표하는 것을 어느 정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영어 발표에 있어서 현지애들처럼 100% 퍼포먼스를 발표에서 보여주기가 어렵다. 뭔가 나도 테드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또는 스탠딩 코미디를 하는 사람들처럼 멋지고 여유롭게 말을 하고 싶지만 그게 잘 되지는 않는다. 가끔 한국에서 미팅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통역을 도와주곤 하는데, 이럴 때마다 사람들은 나를 영어를 잘하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냥 0개국어를 하는 사람일 뿐이다.


나도 유튜브에 나오는 미국 유학생들처럼 마치 현지인보다도 유창한 말솜씨를 뽐내고 싶지만 현실은 영어 실력이 올라갈수록 내 한국말은 점차 어눌해지고 한국말을 좀 하고 있자니 금세 영어 실력이 후다닥 사라지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초반에 유학을 오고 한국에서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 쓰는 유학생들을 보고 "재수 없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들도 0개 국어 피해자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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