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그리스인들은 다신교도들이었다.
전문 분야와 특화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보호와 혜택을 빌었다.
경전이 있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신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했다.
경전을 ‘성경’이라고 부르지 않고 신화 즉 ‘신들의 이야기’라고 부른다. 왜?
신성화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성서나 이슬람의 꾸란은 역사의 한 시점에서 사료를 정리하고
더 이상 빼지도, 넣지도, 바꾸지도 못하게 했다. ‘성스러운 텍스트’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고대그리스인들은 제문으로 쓰는 이야기를 그대로 두었다.
여러 버전이 있고 통일성이 없어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읽으면 된다.
유럽의 젊은이들이 성경보다 그리스 신화를 더 친숙하게 느끼는 것은
이러한 자유로움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고대그리스인들의 성서는 경전이 아니고 하나의 문학 작품이다.
정리해 기록한 사람들을 성자라고 하지 않고 위대한 시인이라고 부른다.
신들의 왕은 제우스였는데, 그는 최고의 바람둥이였다. 여자 친구가 최소 50명은 되었다.
여러 여신들이 정식 부인이 되거나 여자 친구가 되었다.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인간 여자들이 여자 친구가 되었다.
제우스가 마음에 들어 하면 대개 그대로 여자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식을 낳았다.
인간 여자 친구는 왜?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도시국가들은 시조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영웅’ 즉 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존재이기를 바랐으며
특히 제우스의 아들이기를 바랐다. 제우스는 너그럽게도 그 소원을 들어준 것이다.
인간 여자 알크메네가 낳은 헤라클레스는 도시국가 도리스의 시조이고
다나에가 낳은 페르세우스는 도시국가 미케네의 시조였다.
그런데 제우스의 아들로 태어나면 제우스의 부인 헤라의 악독한 구박을 피할 길이 없었다.
헤라는 자신도 세번째 부인이었으면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는 메타 인지가 절대 부족한 여신이었다.
디오니소스는 헤라가 생모를 광채에 타 죽게 하는 바람에 아버지의 허벅지에서 자라 세상에 나왔다.
게다가 구박을 받고 2번이나 죽었다가 살아났다.
헤라클레스에게는 더 심했다. 자기가 낳지 않은 남편의 자식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악행의 종합 판이었다.
아내와 자식까지 죽이게 만들었으니 그 이상 더 잔인할 수 있겠는가?
원래 가졌던 이름도 잃고 ‘헤라의 영광’을 뜻하는 헤라클레스로 이름이 바꾸었지만 소용 없었다.
헤라가 내린 12개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제우스는 인간 여자가 낳은 자식들이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될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 여자를 따라다녔을까? 도시국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목적만 있었을까?
아니다.
인간 여자들이 여신과 달랐기 때문이다. 무엇이 다른가?
존재 속에 시간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나서 자라고 성숙해지고 늙는다.
꽃봉오리가 맺힌다. 꽃이 활짝 핀다. 꽃이 시들어 떨어진다.
탄생이 있고 절정이 있고 종말이 있다.
그 변화의 과정이 이야기를 만든다. 그 이야기가 개인성이다.
그 개인성이 인간을 사랑하게 한다.
모두 다르게 변화하므로 어떤 사람이든 그는 유일하다.
왜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 왜냐하면 그 사람이니까.
신들은 어떤가?
제우스가 카오스-혼돈을 코스모스-질서로 만들자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였다. 평화와 안정이 왔다.
영원한 평화와 영원한 안정이다.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자신이 팽팽한 얼굴과 근육을 영원히 간직하는 것은 좋지만,
사랑하는 상대의 얼굴과 근육이 영원히 팽팽하다면 지루함을 참을 수 없다.
투명하게 굳은 젤리, 뜨거운 사막의 공기와 같다. 변하지 않는다.
젤리를 툭 건드려 떨게 했으면, 뜨거운 공기 속에 저 멀리 오아시스가 잠깐 아른거렸으면,
눈가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으면... 제우스는 희망한다.
제우스가 인간 여자를 사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