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가 어느 날 제우스신에게 불려 갔다. 동물 생태계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야기를 들은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자기가 에코 시스템을 만들어 보겠다고 졸랐다.
프로메테우스는 청을 들어주었다.
에피메테우스는 일을 시작했다.
동물들의 콘셉트를 잡고, 살 곳을 정하고, 서바이벌에 필요할 만한 것을 만들어 주었다.
새는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고, 물고기는 물속을 헤엄칠 수 있도록 지느러미를 붙여주고, 땅 위에 살게 될 동물에게는 춥지 말라고 털을 붙여 주었다.
일이 끝났다. 프로메테우스가 와서 물었다. 인간은?
에피메테우스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줄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간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날개도, 지느러미도, 털옷도 없었다. 맨 몸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헤파이스토스 대장간에 가서 불을 훔쳐다 주었다.
아테나에게서 지혜를 훔쳐다 주었다.
제우스 집에는 들어가지 못해서 인간들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정치를 훔쳐다 주지 못했다. 유감이었다.
제우스는 화가 나서 프로메테우스에게 벌을 내렸다.
산꼭대기 바위에 사슬로 묶여 독수리가 자신의 심장을 파먹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며,
심장이 다시 생겨 매일 그 일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인간은 프로메테우스가 그렇게 가혹한 일을 당하게 된 것이 매우 송구스럽다.
가져다준 선물들은 물론 고마운 것이었지만, 화가 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에피메테우스가 여자 판도라에게 빠져 결혼을 하고 게다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해서
인간에게 모든 불행이 쏟아져 나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희망’은 남겨주었다고 변명한다면 최악이다.
희망 때문에 인간은 더 불행하다. 미래를 꿈꾸느라고 귀중한 ‘지금 여기서’ 살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가 깜빡 잊고 인간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은 것은 아주 잘 된 일이었다.
미안해할 일이 전혀 아니다.
아무것도 받지 않아서 어디서든 살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은 아주 설득력 있게 그 이유를 설명한다.
20세기 철학 사조 실존주의는 무신론에서 출발하는 인간론이다.
인간이 태어난다. 태어날 이유나 목적이 있는가? 없다.
사물을 보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만들어지는 이유와 목적이 있다. 용도가 있고 쓰임이 있다.
그것이 사물의 본질이다.
예컨대 칼을 보자. 칼은 무엇인가를 자르기 위한 도구다.
사람은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모양을 생각해서 본을 만들고 재료를 구해서 칼을 만들어낸다.
콘셉트가 있고 사물이 만들어진다.
본질이 있고 그다음에 존재가 따라온다.
그렇다면 인간은? 칼처럼 인간의 본질을 만드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바로 신이다. 그런데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죽었다.” 독일 철학자 니체가 말했다.
어마어마하게 임팩트가 컸던 이 한 마디는 사실
로마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했던 말을 다시 한 것뿐이다.
그는 『사물에 본성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썼다.
“세계에는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다.
세계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인간이 창조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도 니체의 말에 동의했다. 스피노자와 포이어바흐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들은 주장했다. 신이 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의 형상대로 신을 만들었다.
신이 계시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인간의 본질이 사라진다. 태어날 이유와 목적을 결정하는 존재가 없으므로 본질은 규정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아무런 전제 없이 세상에 툭 던져진 존재다. 실존주의가 보는 인간이다.
세상 속에 맨 몸으로 버려진 인간은 어디서 본질을 찾는가?
살면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실존이 있어야 본질이 생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다.
그리스신화에서 창조된 인간은 실존주의가 정의하는 인간과 일맥상통한다.
인간은 살 곳이 정해지지 않았고 받은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디서나 살 수 있고 무엇이나 할 수 있다.
인간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신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은 스스로가 자신을 만들어야 한다.
두 명제는 똑같이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라는 것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