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토리아 Jun 24. 2024

박물관을 지키는 것은 너무 힘들어: 피렌체

유적을 많이 물려받는 것은 좋은 일일까? 한 나라 보다 더 많은 유적을 물려받은 도시가 있다면 어떨까? 

이탈리아의 피렌체에는 스페인 전체보다 더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스페인은 섭섭할지 모르지만, 공신력 있는 유네스코 보고서를 따른 것이다. 

궁전 21개, 역사적 교회 55개, 미술관 8개, 박물관 20개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고, 시민들은 박물관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피렌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비천한 출신의 은행가 집안 '메디치' 가문이었다. 

정치력을 발휘해 거의 2세기 동안 피렌체에서 실권을 행사했다. 

딸 둘을 프랑스 왕비로 만들었고 아들 셋을 교황으로 만들었다. 거의 한 왕조였다. 

가문이 했던 많은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공화국 피렌체의 염원이었던 ‘두오모’ 성당 돔의 건축 

자금을 댔고, 화가들을 창작에 필요한 모든 물질적 지원을 했으며, 도서관과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했고, 그리스로마 시대 원전을 찾아 필사하게 해 책을 만들었다. 

돈을 잘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잘 쓰는 것도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들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가문이 했던 일중에서도 가장 위대했던 것은 그렇게 예술가를 믿고 자유를 준 것이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예술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라는 것까지 알았으니 대단한 사람들이다.  


예술과 학문의 프로모션에 돈을 댄 것은 메디치 가문만이 아니었다. 밀라노의 스포르자, 로마의 보르지아, 모데나와 제노아의 도리아 가문 등도 있었다. 그러나 '메디치'만 이름이 남았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후원자는 예술가를 잘 만나야 한다. ‘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활동의 지원’이라는 의미로 흔히 쓰는 단어 ‘메세나(mecenat)’는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보좌관이었는데, 후원했던 예술가들 중에 위대한 시인들이 둘이나 있어 그를 찬양했기 때문에 보통명사가 되어 이름이 남은 것이다. 

메디치 가문도 그 비슷하다. 당시 피렌체는 유럽 역사상 가장 많은 천재적 재능이 모여들었던 도시였다. 

단테, 마키아벨리,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도나텔로, 브루넬레스키… 쟁쟁한 이름을 숨 가쁘게 

나열해야 한다. 어떻게 이탈리아 반도의 예술가의 70%가 한 도시에 모였었는지 설명한 사람은 아직 없다.


이 정도 천재의 집중 현상은 유럽 역사상 단 두 번뿐이었다. 고대그리스 페리클레스 시대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다. 그러니까 메디치 가문은 이 위대한 시대를 만났던 것이다.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가!  


가문이 아무리 막강했어도 후손이 끊기는 비극을 피하지는 못했다. 

적통과 방계 후손 모두 단절되어 단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마지막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 디 메디치는 대단히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빌 게이츠쯤 되는 부자가 몇 대에서 걸쳐 수집해 보관하고 있었던 어마어마한 양의 컬렉션을 1743년 

피렌체 시에 기증한 것이다. 기증품을 피렌체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 유일한 조건이었다. 

이로서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손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과연 그 가문의 후손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오피스, 즉 이탈리아어 ‘우피치(Uffizi)’는 미술관이 되었다. 

유럽 각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 그 정도로 걸작이 많이 모인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Stendhal)은 너무도 많은 위대한 작품에 둘러싸여 현기증으로 쓰러질 뻔했다고 

적었다. 그때부터 예술품 앞에서 기절할 정도로 감동하는 것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부른다. 


피렌체는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작품을 보관하고 관리하고 작품을 보러 오는 관광객을 맞이하는 

일만도 너무 많았다. 그런데 유적을 지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2차 대전 때 히틀러는 예술품들을 징발해 여러 곳에 분산 보관했다가 독일로 빼돌릴 계획을 세웠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무엇을 했을까? 

도처에 널린 것이 예술품이니 그 정도는 가져가도 괜찮다고 생각했을까? 

 

전쟁에서 패배가 분명해지자 독일군은 흩어져 보관했던 미술품을 다시 모아 국경을 넘어 독일로 가져가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동원된 피렌체 사람 하나가 작품의 이동 경로와 보관처를 기록했다. 

아직도 그 노트를 잘 보관하고 있는 그의 후손은 언제든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노트를 넘겨받은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와 연합군은 황급히 문화재 회수 작업을 시작했다. 

흩어진 그림을 찾아 제자리에 돌려놓는 데 20년이 걸렸다. 피렌체 시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증자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다. 


그림 회수 작업을 겨우 끝냈을 때 재난이 덮쳤다. 몇 주 동안 비가 계속 오더니 몇 시간 만에 아르노 강이 

불어 넘쳤다. 자동차 1만 5천 대가 떠내려간 1966년 대홍수였다. 보물이 그득한 도시가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주택 지하실에 있던 난방용 석유가 흘러나와 끈적한 진흙탕을 만들면서 여러 곳으로 퍼졌다.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화가 ‘치마부에(Cimabue)’가 그린 ‘십자가’가 물에 흠뻑 젖었다. 

4m짜리 목판을 끌어내리자 조각조각 떨어졌다. 조각을 모았다. 물에 떠 있는 물감은 체로 걸러냈다. 

물이 빠지고 나서 거의 누더기가 된 그림을 복원해 제 자리에 걸었다. 



‘세례 요한 세례당’의 그 유명한 기베르티(Ghiberti)의 ‘천국의 문’도 상황이 심각했다. 

“기적의 계시처럼 상상력을 흔드는 작품”이라고 미술 비평가가 말했던 작품이다. 

물살에 문이 떨어지면서 청동 패널이 조각조각 떨어졌다. 그리고 진흙탕에 묻혀 1㎞ 떨어진 곳까지 

제멋대로 흘러 내려갔다. 한 달 반 동안 진흙탕 속을 더듬어 하나하나 패널 28개를 찾았다. 

기베르티가 27년 동안 제작했던 작품을 복원하는 데 27년 걸렸다. 복원한 원본은 박물관에 두고 

세례당 문은 복제품으로 만들어 달았다. 정말 박물관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관광은 피렌체 사람들의 생활수단이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방문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깊이 있는 지식도 각별한 애정도 없으면서 ‘직관’을 즐기겠다고 먼지를 일으키며 몰려다니는 

관광객들을 보는 것은 때때로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피렌체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은 괜찮은가 보다. 로마시대 격투기 ‘칼치오 스토리코(Cacio Srorico)’ 경기장에서 1년에 한 번씩 모여 근육질 몸으로 치고받고 있는 피렌체 청년들을 보면, 세월을 흠뻑 마시고 있는 건물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 별로 피곤해 보이지 않는다.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유럽인들을 가까이서 보면 때때로 역사의 무게에 눌려 잘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인다.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지쳐 미래를 바라볼 힘이 남아 있지 않는 것 같다. 마치 백미러로 뒤를 바라보느라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운전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