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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아 Jun 17. 2024

“너무 무리해서 기독교가 분열했다”: 성당 건축비

유럽의 전체 유적 80%가 종교 건물이다. 유럽 주요 8개국에 40만 채, 프랑스에만 9만 채가 있다. 

이 많은 건물의 건축비는 어떻게 마련했을까?  


중세기 후반 프랑스 북부 평원에 거대한 성당들이 솟아올랐다. 이전과는 매우 다른 양식이었다. 

벽을 높이 쌓고, 천장을 높이 올렸다. 벽을 얇게 하고, 유리를 끼워 내부를 환하게 했다. 

성당 건물을 대표하는 고딕 양식이다. 

촛불만 겨우 밝힌 깜깜하고 추운 집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화려한 빛은 황홀한 천국을 만나게 해 주었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양식이라고 불렀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균형과 조화의 감각을 잃어버린 황당한 

건물이라고 생각하고 ‘고딕(gothique)’, 즉 ‘기괴한’ 양식이라고 불렀다. 

이 기괴한 양식은 시선에만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건축비 모금에도 엄청난 부담을 주었다. 

석재가 훨씬 더 많이 필요했고 유리 같이 귀하고 비싼 건축 자재가 있어야 했다. 활짝 핀 장미 같다고 해서 

‘장미 창’이라고 부르는 둥근 스테인드글라스는 같은 면적의 돌 벽을 쌓는 것보다 돈이 4배 더 들었다.


국가 예산을 마음대로 쓰는 왕이 스폰서가 되면 건축비 조달이 쉬웠다. 독실한 신앙으로 프랑스 역사에 길이 남아 있는 루이 9세는 십자군원정 때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을 입수하고 프랑스 1년 예산의 절반을 뚝 잘라서 넣고 파리에 생트 샤펠을 건설했다. 1,100개의 성경 이야기가 담긴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유명한 채플이다.  



주교들이 건축 공사를 진행하면, 건축비를 모으기 쉽지 않았다. 교회 소유 농지의 소출을 모으고 숲의 나무를 베어 팔았다. 세금의 절반을 헌금하게 하고 일반 신도들의 헌금을 받았다. 그래도 모자랐다. 

건축 자금이 바닥나면 공사를 일단 중단했다가 비용이 모이면 다시 시작했다. 고딕 성당의 건축이 대체로 

100년이 넘게 걸렸던 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자금 부족 때문이었다. 


기독교는 특이하게 사람은 태어나면서 누구를 막론하고 죄가 있다고 본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도 물려받은 원죄가 있어 이미 죄로 무거운 상태인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혼자 힘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원죄와 아울러 예수님이 겪었던 고난에 대한 죄책감까지 가져야 한다.


중세기 유럽인들은 늘 겁에 질려 용서를 빌고 기도했으며, 

고행, 성지 순례, 성 유물 숭배 등 여러 방식으로 속죄를 빌었다. 

11세기 유럽 기독교인들은 목에 십자가와 큰 조개껍질을 걸고 맨발로 걸어 다니며 성지들을 순례했다. 

성스러운 유물들이 발견된 곳이나 입수해서 보관하고 있는 곳은 곧 성지가 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베일, 예수의 수의, 예수의 탯줄, 성모 마리아의 젖과 같이 상상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경건하고 성스러운 삶을 살았던 성자의 신체 일부 혹은 신체에 닿았던 물건 등도 숭배의 대상이었다. 

치아, 팔뼈, 손, 손가락 등이나 입었던 옷의 조각들은 바라보거나 손을 대거나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 죄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천국에 가서 좀 더 좋은 자리를 얻어 영생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주교들은 유물을 성당 안에 모셔 두고 순례를 하게 했으며, 

신도들은 천국에 가려고 무리한 지출을 마다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88km 떨어진 소도시 샤르트르의 노트르담 성당은 성모 마리아의 베일을 입수하고 엄청난 액수를 모금한 후에 건축을 시작했다. 그 덕분에 25년이라는 기록적으로 짧은 시간에 성당을 완성할 수 있었다. 

독일 쾰른의 대성당은 2만 명 신도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설계되었는데, 30층 건물에 맞먹는 높이의 

대성당 건설은 신도들이 엄청난 액수를 헌금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베들레헴으로 왔던 동방박사들의 뼈를 입수한 것이 알려져 신도들이 몰려든 덕분이었다. 쾰른 대성당에 들어가면 지금도 금으로 만든 궤에 모신 동방박사들의 뼈를 볼 수 있다. 



점차 성당을 신축하거나 개축하려면 반드시 성스러운 유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로마의 지하 묘지 카타콤의 벽감에 있던 초기 기독교도들의 유골은 11세기부터 이미 사방으로 흩어졌다. 

유물을 찾으면 투명 유리와 금으로 함을 특별 제작해 보석으로 치장했다. 

큰 투자였지만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신도들은 유물의 진위 여부나 입수 경로 등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한 통계에 의하면 세례 요한의 손가락이라고 알려진 유물이 현재 50 군데 남아 있으며 

머리가 모셔진 곳은 12 군데다. 다양한 방식으로 복제된 것이다. 

한국인 순례자도 많은 스페인 콤포스텔라를 성지로 만든 야고보의 유해는 어떻게 팔레스타인에서 

지중해를 건너 스페인 최북단 갈리시아 지방에서 발견되었는지 신비의 영역이다. 


성 유물은 현재에도 계속 나온다. 바티칸 교황청이 가장 많이 보관하고 있다. 1,400여 점에 이른다. 

가장 최근의 성 유물은 2005년 사망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혈액이다. 

저격범의 총에 맞은 교황이 사망하기 전 흘린 피가 튜브에 넣어 보관되어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시작된 면죄부 판매는 건축 비즈니스의 정점이었다. 

면죄부를 사면 사는 사람의 죄만이 아니라 이미 죽어서 지옥에 가 있는 부모나 형제를 천국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선전했다. 은행을 운영했던 메디치 가문의 아들인 교황은 사제들을 영업사원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성당 건축을 위한 무리한 모금은 결국 루터주의자의 집중적 항의를 받았다. 

기독교는 ‘보편성’, 즉 ‘가톨릭’과 ‘항의하는 자들’, 즉 ‘프로테스턴트-신교’로 분열했다. 


교회 건물에 대한 신구교의 차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톨릭은 성전 건축에 많은 공을 들이지만, 무리한 성당 건축 모금에 반발했던 프로테스턴트들은 

간소하고 수수한 예배 공간으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신교도들은 도시 한가운데 있는 건물의 2층이나 지하층을 빌려 성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가톨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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