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면 사하라의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가 지중해 유역을 채워 하늘이 청명하고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며 밤이면 별이 반짝인다. 너무 춥지도 너무 덥지도 않아 인간이 살기에 좋다.
그러나 생명을 키우기에는 어려운 기후다. 추위로 식물의 생장이 멈출 때 비가 너무 많이 오고,
해가 빛나고 따뜻해지면 필요한 물이 사라져 버린다. 지중해 식물의 향기, 가시, 솜털은
너무 건조한 기후를 견디기 위한 것이다.”
지중해 역사학자 브로델(F. Braudel)이 말하는 지중해 기후다.
맑고 따뜻한 날씨는 열린 공간들을 만든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발코니(balcony)’는 2층 이상 창문에서 돌출한 것이고, ‘테라스(terrace)’는 1층에서 건물
바깥으로 확장한 것이며, ‘스토아(stoa)’는 더위와 비를 잠시 피할 수 있는 기둥이 늘어선 열린
회랑이고, ‘로지아(loggia)’는 지붕과 기둥 몇 개만 두고 건물 한쪽 면을 터 놓은 것이다.
모두 지중해 날씨에서 가능한 건축이다. 유럽 북부처럼 수시로 가는 비가 내리거나 찬 기운이
스며드는 곳에서는 낼 수 없다.
파리나 함부르크에서 바깥 경치를 즐기고 싶으면 넓은 유리창을 내는 방법 밖에 없다.
완전하게 열린 공간도 있다. 광장이다. 여러 기능을 부여받은 공동체의 공간이다.
‘아고라(agora)’는 고대그리스인들은 모여 ‘폴리틱스’ 즉 ‘도시국가의 일’을 의논하고 결정했던 광장이었다. 신전과 영웅을 기리는 기념물을 배치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만남, 집회, 길고 지루한 토론, 시민회의,
행사, 엄숙한 결의” 했던 정치적 공간이었다.
로마제국의 광장이었던 ‘포럼(forum)’은 정치, 종교, 문화, 상업적 기능이 합해진 다목적 공간이었다.
도시 한가운데 만들어 전쟁에서 승리한 인물들의 동상을 배치하고 집단 종교 행사를 거행해 공동체를
단합하게 했다. 로마 군대가 정복하고 통치했던 지중해의 모든 지역에는 어디에나 포럼이 있다. ‘포럼’은
이제 한 주제에 대한 ‘자유 토론’을 뜻하는 단어로 쓰고 있으니 그 원래 취지를 일부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아고라가 ‘민주주의의 산실’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람이 만나면 얼굴을 마주 보고 말을 나눈다.
이야기를 나누려면 상대방의 존재를 의식하고 그가 하는 말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그 전제 없이
대화란 없다. 일방적인 명령이고 일방적인 복종일 뿐이다.
어디서 눈을 똑바로 쳐다보나? 어디서 말대꾸를 하나? 그렇게 불평등한 관계에서 대화란 없다.
열린 공간에서 만나 눈과 눈을 직접 마주 보는 것은 민주주의가 발생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었다.
그렇다고 공간이 온통 열려 있는 아프리카에서 민주주의가 생기지 않은 것을 보면 충분조건은 아닌 것 같다.
개방된 공간은 개방적인 기질을 만든다. 지중해 사람들은 외부사람들에 너그럽다.
크루즈 선박에 북유럽 사람들이 많이 타면 식당에 자리를 많이 만든다. 모르는 사람과 같이 앉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유럽 사람들이 많으면 테이블을 많이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잘 어울려 식사한다.
광장에는 남자들이 모인다. 그리스, 이탈리아, 알제리, 튀니지 도시들에는 나무 몇 그루 그늘 아래, 카페에,
야외 시장에 남자들이 모여 있다. 진짜 하는 일이 없다. 지중해 남자들은 왜 이렇게 한가로운 것일까?
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말을 달릴 평원도 없고, 농사를 지을 평야도 없으며,
높은 파도를 헤치며 고기를 잡을 바다도 없다. 그들은 일 년에 50∼100일 정도밖에 일하지 않는다.
북유럽 사람들은 일 년에 200일 넘게 일하는데, 그 절반도 안 된다.
나머지 시간에는 “한가롭게 카드놀이나 토론을 한다.” 분위기를 지배하는 것은 느림의 철학이다.
“인정을 받는 유일한 활동인 상거래가 레저 활동의 리듬으로 진행된다. 서둘러 거래를 끝낼 필요가 없다.
사고팔고 벌어들이고 잃는 것보다도 끊어졌다 다시 시작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와 흥정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생산 활동이 활발하지 않으니 먹을 것이 많지 않다. “태양 아래서는 배고픔도 견딜 만하다.”
『이방인』을 쓴 노벨상 작가 카뮈만 그렇게 생각했을까?
배고픔에 시달리던 이탈리아인은 20세기 초 40년간 450만 명이 미국 동부로 이주했다.
미국으로 이주한 이탈리아 남자들은 도시 부둣가에서 일자리를 기다리며 대기했다. 그들이 쓰고 앉아 있던
플랫 캡 ‘코폴라(coppola)’는 시칠리아 주도 팔레르모(Palermo)의 특산품이다.
시칠리아 출신자들의 비밀 범죄 조직 ‘마피아’ 조직원들도 이 모자를 많이 썼다. 그래서 코폴라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신호를 잘 포착해야 했다.
모자 앞 챙을 올리면 상대와 이야기를 하겠다는 표시이고, 챙을 내리면 너와 말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였다.
챙을 내리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붙이려면 총 맞을 각오를 해야 했다.
‘베레토(beretto)’라고 부르기도 하는 코폴라는 이제 전 세계로 퍼져 이제는 여자들도 패션으로 쓰기도 한다.
지중해 사람들은 낙천적이다. 밤에도 불을 뿜어 올려 지중해의 등대 구실을 하는
스트롬볼리(Stromboli) 화산 아래 사는 500여 명 주민들에게 폭발 위험이 있으니 대피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조용히 집에 머물렀다. 자신들은 화산과 한 몸이며 화산이 자신들에게 폭발을 미리 알려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 지금이야! 화산이 그렇게 알려준다 해도 대피할 시간이 없을 텐데. 피할 시간까지 미리 계산해서
알려준다면 몰라도. 감탄이 나오는 낙관주의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활동이 활발한 화산 중 하나인 에트나(Etna) 화산을 보고 살고 있다.
불을 뿜어내는 화산을 보며 사는 것이 무섭지 않으냐고 물어보면 설령 폭발한다 해도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고 말한다. 화산재가 땅으로 비옥하게 만들어 소출을 늘여주며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죽음도 불사하는 태평성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제는 스트롬볼리와 에트나 두 화산이 폭발했다. 그 아래 사는 사람들은 물론 움직이지 않았다.
이탈리아 지중해 사람들은 목소리도 크고 제스처도 크고 잘 흥분한다. 이들이 많이 모이기 시작하면 근처
스피커 볼륨을 올린다. 축구를 발명한 영국의 응원단이나 월드컵에서 제일 많이 우승한 독일의 응원단도
유명하지만 이탈리아와 스페인 사람들의 축구에 대한 열광은 종교 숭배 수준이다. 나폴리 남자들이 저녁이면 동네 카페 TV 앞에 모여 소리 지르며 수다 떠는 것을 직접 보아야 한다. 시칠리아 시장에 가서 생선이나 야채를 파는 사람들이 온갖 감언이설로 손님을 부르는 소리를 들어보아야 한다.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