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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아 Jul 19. 2024

한국이 서양-유럽 국가라고?
원하는 게 뭘까?

“한국은 서양(Occident)-유럽 국가다.” 최근 프랑스 지정학자들의 강연과 인터뷰에서 들리는 말이다. 

“서양은 이제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이념적 정치적 개념으로 정의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공유하고 실현한 국가들의 집단으로 규정해야 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 유럽과 미국 외에 호주, 뉴질랜드, 일본, 한국을 서양으로 분류한다는 것이다.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아시아에서 나와서 서양-구라파로 들어간다’, 일본 근대화의 슬로건이었다. 

지리적으로 속해 있는 아시아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정치 문화적으로 발전한 서양-구라파의 

일원이 되는 것은 곧 선진국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력으로 산업혁명을 수행했던 일본은 그 목표에 도달했다. 

이제 우리의 차례가 되었는가? 그렇게 보인다. 


1996년 OECD 가입, 2008년 G20 참가 등 여러 기점을 지나오며 도약한 경제 그리고 2천 년 들어서 

세계 젊은이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문화 파워는 한국의 존재를 전 세계에 확실하게 부각하고 있다. 

단순한 존재 인식 정도가 아니라 대단히 긍정적 이미지가 확산되고 있다는 외국인들의 증언을 들으면 

“마약 먹은 것처럼” 자긍심에 도취하게 된다.   


최근에는 한국의 방위산업이 주목을 받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지난 2월 유럽이 아닌 곳에서 

제조된 무기를 사서 우크라이나에 보낼 것인가 여부를 논의했다. 한국산이 이슈였다. 

“미국 무기나 한국 무기를 사는 게 낫다고 자연반사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 4월 25일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했던 연설의 한 문장이다. 

한국 무기가 세계 최고인 미국 무기와 같은 수준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한국의 존재감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일반 유럽인들의 인식은 아직 거리가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유구한 전통과 압도적 스케일의 인구를 보유한 중국이나 

세계 제2위 경제 대국이었던 일본이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는 국가들이다. 

한국은 일반 뉴스보다는 특집 기사로 소비되는 나라에 가깝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한 편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점수를 올려 메달을 딴 것처럼 신기한 현상으로 취급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k-pop이나 k-drama에 대한 유럽 팬들의 열광적 반응과 유럽에 초청받아 간 한국 스타들에 대한 

열렬한 환영을 소개하는 영상들이 유튜브에 넘친다. 새로운 현상이다. 

그러나 첨단 문화에 대한 선망과 아울러 명품 시장을 향한 장삿속이 꽉 찬 애교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에 대한 긍정적이고 화려한 이미지도 많지만 혹독한 경쟁, 높은 자살률, 

가혹한 노동조건, 건강이나 미용에 대한 병적 관심 등 부정적 측면도 소개되고 있다. 

그럼에도 전쟁을 겪고 분단되어 늘 불안한 안보, 국민의 강렬한 민주적 열망을 따라가지 못하는 

후진적 정치 등으로 소개되었던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나 

최첨단 산업국가, 세련된 문화 국가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러한 경제적 문화적 위상의 변화 때문에 지리적으로 아시아에 있고 역사 문화 기반도 서양에 속하지 

않는 한국을 서양의 범주에 넣는 것일까? ‘고도로 서구화된 동양 국가’, 그렇게 말하면 되지 않는가?   

 

유럽은 현재 자기 성찰의 시간을 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패배’, ‘몰락’과 같은 극단적 

단어들이 학자들의 담론에 등장하고 있다. 멀게는 르네상스 이후, 가깝게는 산업혁명 이후 자신들의 이념과 기획에 따라 세계 질서를 주도해 왔던 시대가 끝났으며 이러한 새로운 질서에 적응해야 한다는 주장들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서 유럽인들은 유럽 밖 세계가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라고 묶어 부르는 비(非) 유럽 국가들은 이전처럼 거의 

자동적으로 미국과 유럽의 이해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다. 

러시아에 즉각 종전을 요구하는 UN 결의에 35개국이 기권했다. “모든 전쟁이 골고루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불만을 표시했다.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도 ‘서양’ 국가들만 동조했다.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인도 사이의 무역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제 당신들이 지휘하던 세상은 흘러가 버렸다.” ‘서양’ 10억 인구에게 나머지 70억 인구가 말하고 있다고 유럽인들은 느낀다. “유럽은 정원이고 나머지 세계는 정글이다”라고 자조적인 박탈감을 표현할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이제 정원을 벗어나 정글로 나올 힘이 없다고 느낄 정도로 위축되고 있다.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 4개국이 시작한 회합은 가입 국가가 늘어 ‘브릭스 플러스(Brics+)’로 진화했고 

계속 확장 중이다. 이란, 이집트, 에티오피아, 사우디, 아랍에미리트가 합류했고, 태국, 알제리, 콜롬비아가 

예정되어 있다. 이들 국가들은 그들 간 동질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안으로 제시하는 새로운 질서도 없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이 경제력에 비해서 지나치게 높은 정치외교적 위상을 누리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변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반(反) 서양 연대인 셈이다. 

‘브릭스’ 국가들의 총생산이 2050년에 G7의 총생산을 앞지를 것으로 예상했지만 작년 2023년에 이미 

이루어졌다. 현재 31.5%로 G7의 30%를 앞질렀다. 전 세계 석유 교역의 80%를 통제하고 있는 것도 

그들이다. 체계나 제도적 구조 없이 느슨한 파트너십을 지향하고 있지만 나름의 재정 시스템, 지불 구조, 

조정 시스템을 갖추고 조만간 ‘서양’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한국을 서양의 한 국가로 언급하는 것은 약간 씁쓸한 소회를 갖게 한다. 

마치 이강인 선수가 입단한 PSG(파리생제르맹) 축구팀이 프랑스 리그의 최고 팀이 되었을 때가 아니라 

3,4위로 밀려났을 때 입단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서양’ 10억 인구 속에 들어가면서 유럽인들처럼 나머지 70억 인구의 경계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도 생긴다.  


한국이 ‘서양’ 국가가 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최근 몇 년간 동향을 

살펴보면 그렇게 보인다.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미국과 유럽의 군사동맹과 연대하자는 제안이다. 

한국을 3회 연속 회의에 초청했고, 연합군 최고 사령관도 긴밀한 연대를 원한다는 언급을 한 바 있으며, 

일본에 연락사무소 설치를 논의 중이다. 

마크롱 대통령이 “뇌사 상태에 빠져 있다”라고 언급했던 NATO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가입국을 

늘이고 회생해 이제는 인도-태평양까지 행동반경을 확장하려고 하고 있다. 

그 목표는 모두가 알고 있듯 중국에 대한 견제다. 한국을 생각해서는 아니겠지만, 중국으로부터 수없이 

침략을 당한 우리 역사를 생각하면 북대서양에서 여기까지 와준다니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단 중 하나가 우크라이나가 NATO에 가입하려는 시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우려가 생긴다. 

그러나 한국은 두 블럭 사이이 완충지대였던 우크라이나와 전혀 다르다. 

이미 ‘서양’의 최전선에 있는 나라다. 미국의 미사일이 배치되어 있는 방어선이다. 

전쟁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고 살아남았던 우리는 미국 없이 살 수 없고 미국에 반대할 수 없다. 

다만 파트너라는 명분으로 과도한 요구와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 예컨대 분담금을 

내라고 하거나, 교관과 병력을 파견하라고 하거나, 무상으로 무기와 폭탄을 지원하라고 하거나 등등.


얼마 전 일본은 중국에 반도체 수출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생산의 50%를 중국에 팔고 있는데, 

중단하면 얼마나 많은 일본 회사들이 망하겠는가? 일본은 거부했다. 우리도 미사일 배치 때문에 중국의 

무역 보복을 이미 받은 바 있다. 그 같은 보복을 또 받아야 할 것이다. 


고래도 아니고 고래가 될 수도 없는 우리는 최소한 등이 터지지 않는 새우는 되어야 하지 않는가? 

가장 좋은 것은 고래들이 힘을 자랑하며 싸우지 않고 넓은 바다를 헤엄쳐 다니며 새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일 텐데, 그런 패러다임으로 전환은 불가능한 희망일까? 



참고: 리오넬 롱두엥(Lionel Rondouin: 전직 군인, 경영학자), 앙드레 라타네(André Latané: 지정학자), Marc Rousset(마르크 루세: 지정학자, 경제학자), 알렉상드르 델 발(Alexandre del Valle: 지리정치학자, 

국제 컨설턴트), 엠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 세빈 다그달렌(Sevin Dagdalen: 

독일 국회의원)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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