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세계 지도를 띄워 아프리카 대륙을 보면 북쪽 거의 절반이 밝은 갈색이다.
'사하라(Sahara)', 세계에서 가장 큰 사막, 망망한 모래 평원에 걸맞은 이름처럼 울린다.
갈색 땅을 잘 살펴보면 약간의 녹색이 보인다. 동쪽에 있는 구불구불하고 가느다란 선은 나일강이다.
이집트 문명을 일으킨 이 위대한 물줄기를 따라 1억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서쪽에는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떨어질 듯 이어져 가늘고 길게 뻗어 있는 그린벨트가 보인다. 사람이 모여 사는 산악지대, 바로 ‘마그레브(Maghreb)’다. 서쪽부터 차례로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세 나라로 나뉘어 있다.
7세기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아라비아 반도를 떠나 이곳에 왔던 아랍인들은 이집트와 리비아를 지나 발견한 그린벨트를 ‘서쪽의 섬(엘 제지라 알 마그립: El Jezirra Al Mghrib)’이라고 불렀다. 넓은 바다와 거대한 사막 사이에 끼어 고립된 ‘섬’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단어는 둘로 나뉘어 각기 지명으로 정착되었다. ‘알 제지라(섬)’은 도시 ‘알제’ 그리고 나라 이름 ‘알제리’에 남았고, ‘알 마그립(서쪽)’은 그린벨트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바다를 끼고 거대한 사막에 바짝 붙어 있는 땅은 어떻게 녹색 지대가 되었을까?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을 받치고 있는 두 개 지각판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에서 만난다. 아프리카 지각판은 매년 1 미터씩 유라시아 지각판 아래로 밀려 들어간다. 지금도 계속된다. 밀려 들어가는 지각판의 땅 껍질에는 천천히 주름이 잡힌다. 그 주름들은 점점 높이 솟아올라간다. 마그레브는 이런 습곡 작용으로 생긴 2천~3천 미터 산들로 채워져 있다. 가을이 되어 비를 머금은 대서양의 저기압이 지중해로 몰려오면 이 높은 산들에 비가 내린다. 산 위에는 나무와 풀이 자라 무성해지고 산 아래 평야에서는 곡식과 채소가 자란다. 마그레브는 이렇게 생긴 녹지다.
마그레브의 높은 산들은 동에서 서로 비스듬히 내려가며 여러 갈래 산맥을 이룬다. ‘미들 아틀라스’, ‘하이 아틀라스’, ‘안티 아틀라스’ 세 갈래 산맥이 모로코 평원을 둘러싸고 있고, ‘텔 아틀라스’와 ‘사하라 아틀라스’ 두 갈래 산맥은 알제리 국토에 해안과 나란히 뻗어 있다.
‘아틀라스(Atlas)’? 귀에 익은 이름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 신과 맞서 싸우는 티탄들에 동조했다가 벌을 받아 세상을 들고 있게 된 아틀라스 바로 그 티탄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티탄이 어깨로 세상을 받치고 있어 하늘이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쪽 끝에서 일 년 내내 흰 눈을 쓰고 있는 높은 산들에 그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멀고 넓은 바다를 ‘아틀라스의 바다(Atlantic ocean)’라고 불렀다.
우리는 '대서양'이라고 부르니 '아틀라스'의 이름이 사라진다.
고대 그리스 문명을 이어받은 유럽인들은 산들을 아틀라스라고 계속 불렀고 그렇게 전파시켰지만, 정작 아틀라스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이름이었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이름의 ‘아드라르(adrar: 산, 베르베르어)’ 혹은 ‘제벨(djebel: 산, 아랍어)’들이었다.
사람들은 주로 비가 오는 산악지대에 몰려 살았지만, 광활하게 펼쳐진 사막에도 유목민들이 살았다. ‘베르베르(berbères)’, 산악지대와 사막에 퍼져 살았던 사람들을 묶어 부르는 명칭이다. 서로 멀리 떨어져 부족 단위 생활을 했지만 비슷한 사회구조, 문화, 언어를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7세기 이슬람이 전파되고 10~11세기 아랍인들의 들어와 정착하면서 점차 소수민족이 되었다.
마그레브는 생태학적, 역사적, 인종적으로 사하라 사막 남부 아프리카 지역과 다르다.
지중해 기후 및 문화권에 속하며 ‘백아프리카’라고 부르는 데서 보듯 인종적으로 백인 계열에 속한다.
또한 아랍 이슬람적 종교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중해 건너 유럽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머리는 유럽에, 심장은 아랍세계에, 다리는 아프리카 대륙에 두고 있다.”
마그레브의 복합적 정체성을 요약하는 전 모로코 국왕 핫산 2세의 유명한 말이다.
세 나라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의 국경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로마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 골격이 유지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람이 살지 못하는 사막은 원래 영토로 포함되지 않았지만, 프랑스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영토화되었다. 프랑스 영토의 일부로 취급받는 식민 직할 통치를 받았던 알제리는 가장 넓은 사막의 땅을 물려받아 288만㎢에 달하는 아프리카 최대 영토 대국이 되었고, 모로코와 튀니지는 각기 71만㎢, 16만㎢로 훨씬 작은 규모의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광활한 불모지 사하라를 건너 오갔던 아프리카인들은 누구도 사막을 소유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건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유럽인들은 달랐다. 아프리카 대륙 북서부 사하라를 포함한 대부분 땅을 ‘세력권(Pré Carré)’이라고 부르며 프랑스가 차지하게 된 과정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그저 사하라를 탐험하고 선언한 것이다. 1898년 프랑스인 장교가 알제리인 병사들을 앞세워 오아시스 도시 비스크라에서 출발해 꼭 1년 만에 사하라를 횡단했다. 사하라 사막의 서쪽 절반이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자를 대고 오아시스들을 직선으로 이어 행정 구역을 설정했다. 그 직선을 그대로 남아 알제리 국경이 되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이 왜 직선인지는 유럽인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유럽인들이 그은 행정 경계선은 그들이 철수한 후 그대로 독립한 10개국의 국경이 되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국경이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어진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것을 바꾸려고 할 경우 생길 분쟁이 너무 많아서 유럽인들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합의는 대체로 지켜졌지만 지리적 민족적 인류학적 현실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분쟁을 피할 수 없었다.
모로코의 5배, 튀니지의 15배에 이르는 영토를 보유하게 된 알제리는 자신의 영토가 7년 넘게 혹독하게 벌였던 독립전쟁에서 치렀던 희생에 대한 보상이며 전리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형제 나라인 모로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두 나라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1956년, 63년, 75년에 발발한 ‘모래 전쟁’이다. 국제사회는 독립전쟁으로 존재감이 높아진 알제리 편을 들었다. 독립투쟁을 하면서 긴밀했던 알제리와 모로코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이렇게 나빠진 두 나라의 관계는 아직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대단히 평화로웠던 형제 국가들 간의 공존의 역사가 유럽 국가의 개입으로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의 역사가 되었다.
알제리와 모로코 두 나라가 잠시 가졌던 데탕트 기간 동안 1989년 ‘아랍마그레브연합(Arab Maghreb Union)’이 발족했다.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외에도 리비아(Lybia)와 모리타니(Mauritanie)까지 포함했다. 이로서 ‘마그레브’라는 지명은 사하라를 포함한 북아프리카에서 이집트를 제외한 지역을 가리키는 단어로 국제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동서 길이가 유럽 대륙과 비슷할 정도로 광대한 지역이지만, 50여 국가가 포진하고 있는 유럽과 달리 5개국 밖에 없으며, 유럽 인구가 약 7억 5천인데 반해 마그레브 전체 인구는 1억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다. 사람이 살지 못하는 사하라 사막의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다섯 나라는 환경, 언어, 역사, 문화, 종교 등을 공유하며 무엇보다도 베르베르인들의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잘 사는 나라들은 아니다. 자력으로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지 못했고, 유럽 국가들의 식민주의는 현대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인적 물적 토대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굴욕감과 패배감만 안겨 주었다. 그들은 탈식민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짊어지고 분투하고 있다.
마그레브에는 ‘마그레브연합’에 정식 가입하지 못한 또 다른 나라가 하나 있다. ‘서사하라’다. 사하라 사막 서쪽 끝 대서양 연안, 모로코와 모리타니 사이에 있는 나라로 국가로 인정을 받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독립하지 못하고 분쟁에 싸여 있다. 문제가 언제 해결될지 예측이 어렵다.
인광석 등의 지하자원이 있고 연안 바다에 풍부한 어장이 있는 서사하라는 원래 베르베르인과 아랍인 유목민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는데, 1884년 스페인이 강제로 점령했다. 유목민들은 점령 기간 내내 철수를 요구했지만, 스페인은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약 100년이 지난 1970년대 이웃 두 나라 모로코와 모리타니가 스페인의 철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모로코는 그곳이 11세기 마그레브 일대를 지배한 ‘무라비툰’ 왕국의 영토였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모리타니는 자신들과 같은 민족이 살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1975년 모로코 국왕 하산 2세는 ‘위대한 모로코 왕국’ 재건을 기치로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왕정을 전복하려는 군부나 반체제주의자들을 누를 수 있는 좋은 명분이었다. 모로코인 35만이 국경까지 행진했던 ‘녹색 장정’이다.
스페인은 급하게 철수를 결정했다. 스페인이 떠난 땅을 모로코와 모리타니가 나누었다. 살고 있던 사람들의 의견은 묻지 않았다. 소외되었던 유목민들은 자신들에게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며 무장 저항을 시작했다. ‘폴리사이오전선(Front Polisario)’이다. 1979년 모리타니가 군대를 철수하고 물러섰다. 유목민들은 ‘사라우이아랍민주공화국’을 건국했다. 유목민들의 주장이 국제법상 주민의 정당한 자결권이라고 하며 알제리가 편을 들었다. 알제리 사막 도시 틴두프에 서사하라 임시 정부가 수립되고, 세계 66개국이 UN에서 서사하라를 인정했다.
그러나 모로코 정부는 이 모든 것이 알제리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며 서사하라에 자국인들을 이주하게 했다. 이주한 모로코인들이 서사하라 영토의 80%에 육박하는 영토를 차지하게 된 시점인 1980~87년 차단 벽을 설치했다. 1988년 모로코 정부는 돌연 유엔이 권고하는 주민의 자율 투표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하고 알제리와 관계도 개선해 ‘아랍마그레브연합’의 창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1992년으로 예정된 주민 투표는 실시되지 않았다. 모로코 정부가 영토 내 정착한 모로코인도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유럽과 미국이 중재했지만 서사하라나 모로코 어느 한쪽도 물러서지 않았다.
서방 세계는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모로코 정부의 눈치를 보며 난민촌에서 생존에 몰려 있는 서사하라 주민들의 열악한 상황을 모른 척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로코가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서사하라에 대한 모로코의 영토권을 인정했다. 최근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도 서사하라를 모로코의 일부로 인정했다. 서사하라의 독립은 더 어려워지고 있다.
지도 출처: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