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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아 Aug 02. 2024

파리 황금 돔 아래 있는 시신은
나폴레옹이 맞을까?

“황제 폐하 만세!” 리볼리, 오스테를리츠, 예나, 바그람… 파리 지하철 역은 나폴레옹이 대승을 거두었던 

전투지 들이다. 주르당, 베르티에, 란느, 뮈라… 파리 시 둘레를 도는 순환도로는 나폴레옹 수하 장군들의 

이름이다. 파리를 지키는 수호신들이다. 비록 2차 대전 때 나치 군대를 막지 못했지만.



나폴레옹이 지배했던 기간은 사실 14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영원하다. 세계 사람들도 안다. 

삼각 모자, 흰색 스키니 바지, 검은 장화, 청색 재킷 그리고 조끼 단추 사이로 찔러 넣은 손, 

나폴레옹의 트레이드마크는 누구나 알아본다. 

유럽 역사가 낳은 출중한 인물의 종합 판이었다. 카이사르처럼 정복했고, 아우구스투스처럼 황제가 되었고, 한니발처럼 알프스를 넘었다. 게다가 프랑스 역사상 3명밖에 없는 황제였다. 

부르봉 왕가의 18명의 ‘루이(Louis)’들은 고작 왕이었는데!  


나폴레옹은 지중해의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났다. 널리 알려져 있지만. 섬을 프랑스식으로 ‘코르스(Corse)’라고 부르지 않고 이탈리아 식 ‘코르시카(Corsica)’로 더 많이 부른다. 원래 이탈리아 도시국가 

제노바의 땅이었다.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3달 전에 프랑스에 팔렸다. 

나폴레옹은 원래 이탈리아어로 ‘나폴레오네’였다. 영화 ‘대부’의 마피아 집안 ‘코를레오네’와 운이 맞는다. 

긴장감이 훅 떨어진다. 비음을 마지막 음절에 깊이 울리는 ‘나폴레옹’과는 전혀 다르다. 프랑스 역사의 

화려한 한 자락이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다.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3개월 차이로 가까스로 프랑스인이 된 나폴레옹이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황제가 된 것은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고 겨우 10년 밖에 지나지 않는 시점이었다. 

왕과 왕비를 그렇게 처참하게 죽이고 나서 황제를 뽑다니? 피로 쟁취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 제 정신인가? 혁명은 왜 했는가? 프랑스인들에게 늘 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나폴레옹은 9세 군사학교 입학해서 16세 포병으로 전투를 시작하고 35세 프랑스 군 총사령관이 되었던 

직업 군인이었다. 뛰어난 전략가로 총 80회 전투에서 70회 승리했다. 

프랑스 역사상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늘려 프랑스인의 자부심을 한껏 부풀렸다. 벨기에, 홀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프랑스인이었다고 생각하면 좀 더 이해가 쉽다. 

그가 안겨준 영광으로 프랑스인들은 짧지만 강렬한 시대를 살았다. 그가 수행했던 30년간 전쟁에서 

프랑스인은 100만 명을 잃었다. 3천만이 안 되는 인구 가운데 청년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지만 

프랑스인들은 그 엄청난 희생을 별로 기억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은 멀티였다. 수많은 일에 손을 댔고 손을 대는 것마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31세에 종신 집정관이 된 후 쌓은 업적은 일일이 거론하기도 어렵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종교재판을 중단시켰다. 국영 은행을 설립하고 증권거래소를 설립했다. 지방 단위 행정을 수립하고 책임자를 중앙정부에서 임명해 국가 행정을 정비했다. 산업 시설을 확충해 산업을 활성화했다. 

도로를 정비하고 도시를 근대화했다. 세제를 개혁하고 법체계를 만들었다. 2천 년이 넘는 유럽 역사에서 

법은 로마법과 ‘나폴레옹 법전’ 둘 뿐이다. 고등교육제도를 조직화했다. 유명한 대입 고사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는 이때 생겼다.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 제도를 만들었다. 

이집트 원정을 할 때는 160명 학자를 따라가게 해 이집트학이 시작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의 지적 능력에서 개혁적이고 근대화된 프랑스가 탄생했다. 


그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 조금 걸린다. 

“불가능은 프랑스적이지 않다(L’impossible n’est pas français).” 그가 했던 말이라고 역사학자들이 

단언한다. “한국인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그 비슷한 얼마든 할 수 있는 평범한 문장이 아닌가? 

그런데 ‘사전’이라는 단어가 들어오는 바람에 압축적 강도가 높은 비범한 문장이 되었다. 

그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알았다면 그렇게 뛰어난 카피를 만들어 

준 것을 고마워하지 않았을까? 물론 나폴레옹에게 불가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중단이 불가능했다. 

브레이크가 망가져 폭주하는 자동차였다. 


그 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은 프랑스 국민 전체를 설득한 것이다. 대혁명이 몰고 온 폭력, 

무질서, 공포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고 싶어 하는 다수의 사람을 착각하게 한 것이었다. 

그는 아주 부드럽게 자신이 왜 황제가 되어야 하는지 설득했다. 


계속되는 왕당파의 음모를 봉쇄해 돌아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근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유럽 

왕실들에 혁명이 끝나 프랑스가 안정되었고 다시 절대군주 체제로 돌아가 유럽이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안심시켜야 한다. 그래야 쳐들어 오지 않는다. 유럽 왕실들은 프랑스 왕정이 무너지면 자신들도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해서 연합군을 만들어 침공할 것을 고려했었다.

그리고 황제 체제와 공화국은 반대 명제가 아니다. 황제 체제는 대혁명이 성취한 자유, 평등, 박애를 

지키기 위한 권위적이고 중앙집권적 체제다. 공화국을 구하려면 황제가 필요하다. 

이 모순된 말에 국민은 드디어 설득되었다. 황제 직을 세습해야 한다는 것에도 설득되었고, 

형제자매들을 점령지의 왕으로 봉해 권력을 사유화하는 것도 그래도 두었다. 


프랑스 국민은 착각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강한 빛에 잠시 정신을 

잃은 것처럼 눈을 뜨고 보면서도 보지 않았다. 급격한 실각, 유배, 사망으로 ‘현실 자각 타임’을 갖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신화가 되는 데는 영국인들도 일조했다.


워털루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항복한 후 자신을 미국으로 보내거나 영국의 한적한 시골에서 조용히 

지내게 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니었다. 영국인들은 치를 떨었다. 나폴레옹은 범죄자다. 

“평화와 인권의 적”이다. 시체가 되기 전에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다.


2천㎞ 떨어진 남대서양의 바위섬으로 보냈다. 배로 가는 데 3개월 걸렸다. 지금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비행기로 6시간 걸린다. 영국군 2천 명이 주둔해 감시했고, 배를 띄워 24시간 섬 주위를 돌며 감시했다. 

작은 집에서 살게 했고 아플 때 돌보지 않았다. 책임을 맡은 영국군 장군은 그를 진심으로 미워했다. 

병이 걸렸을 때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의료진을 런던으로 철수시켰다. 

억누를 수 없는 증오심이었다.

 

1821년 드디어 나폴레옹이 숨을 거두었다. 6년간의 섬 생활이었다. 위암이 사인이었다. 

“나의 재가 센 강가 내가 사랑했던 프랑스 국민들 곁에 머물기 바란다.” 유언을 남겼다.


시신은 알코올을 뿌린 후 그대로 입관했다. 보병 장교 복장이었다. 숭배 의식이 벌어질까 걱정한 영국 정부는 신체를 보존하지 못하게 했다. 덥고 습한 날씨에서 시신이 곧 부패하기 시작했다. 관에 땜질을 했다. 


나폴레옹의 사망은 프랑스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나라들에 배상하느라 

정신이 없는 마당에 무슨?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아들의 시신을 보내줄 것을 호소했다. 그래도 황제가 아닌가? 프랑스인들이 나섰다. 20년 가까이 지나 영국인들이 드디어 시신을 돌려주었다. 파리 시민들이 참석해 

장례식을 거행했다. 유해는 파리 ‘엥발리드’ 금빛 찬란한 돔 아래 대리석 관에 안치되었다. 


나폴레옹 사망 200주기였던 2021년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헌화하고 기념식을 거행했다. 나폴레옹의 

시신의 진위에 대한 의문이 다시 제기되었다. 대리석 관에 잠들어 있는 시신이 과연 나폴레옹이 맞는가? 

너무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다. 



처음 제작된 것과 다른 목재 관을 배달되었다. 그리고 시신의 보존 상태가 너무나 완벽했다. 사망 3일 후 

매장되었는데, 훈장, 양말, 부츠가 그대로였다. 일부 물건은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훈장의 개수도 달랐다.

데드 마스크도 확실히 나폴레옹의 얼굴이 아니었다. 빛을 최대한 약하게 하고 시간을 짧게 잡아달라. 

영국 측이 시신을 확인할 때 붙인 조건도 뭔가 수상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인가? 나폴레옹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센 강을 바라보는 금빛 찬란한 돔 아래 

대리석 관에 누워 프랑스인들과 영원히 함께 있다. 역사는 정말 너무 쉽게 눈을 감는다.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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