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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판게아 May 14. 2024

벙어리장갑 | 2화

이상한 밤.

첫 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날의 밤이었어.

관짝 같은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는데,

엄마가 빨아준 활동복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 거야.


점점 진하게 올라오는 그 익숙한 '피죤냄새'가 그날 그 밤 나를 어찌나 괴롭히던지.     

방독면을 뚫고 파고드는 CS가스보다 더 맵싸하게 '정신'을 무너뜨리는데.

제대하는 날까지 나를 울게 만든 건 끝끝내 군대도 선임도 아닌 '좋은 냄새' 였어.

오늘 이 밤 그때의 기억이 생각난 건 너에게서 나는 좋은냄새 때문이겠지.




천장조명의 전기 타는 소리가 호박나이트클럽 3번 룸 안에서 나는 가장 큰 소리라면, 

지금 이곳이 얼마나 심란한 분위기일지 가늠할 수 있으려나.  

멀지건히 들리는 쿵쾅대는 음악소리와 옆방에서 넘어오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반가울 만큼, 

고요하면 안 되는 곳이 고요하니 나까지 벙어리가 된 기분. 8월 폭염에도 이곳은 춥다. 

에어컨을 줄일까 고민해 봤지만 이 오한은 빵빵한 에어컨 때문이 아니라 저 '아이' 때문일 거야. 


청각장애인과 부킹이 된 나는 그녀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은 채, 

불리지 못한 후보선수처럼 벤치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다. 


어려울거 없이 그냥 나가달라고 하면 되는데 왜 입이 안 떨어질까.

바닥에 떨어져 있는 병뚜껑과 포도껍질을 의미 없이 헤아리던 승진의 눈앞으로 밝은빛이 끼어든다.


[안 보여요]


그녀가 들이민 휴대폰 속 글자와 함께 진하게 풍겨오는 좋은냄새. 

고개를 든 뒤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는 이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를 보고 말하면 돼요.]


할말도 없는데 무슨 말을 하라는걸까. 


[괜찮으니까 말해요]


전혀 안괜찮은데... 

습한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따뜻하고 포근한 피죤냄새가 자꾸만 코를 찌른다. 


"이레라고 했지? 만나서 반가워." 


웃기지도 않은데 웃었고 이상하게 친절해졌다.  

본디 나란 인간은 친절과 담을 쌓은 경상도 상남자아닌가.

이게 다 장애인에게는 무조건 친절해야 한다고 배운 '도덕수업' 때문이다. 


[나는 스무 살. 오빠는 몇 살이에요?]

"내는 스물셋. 말 편하게 해. 아니. 무. 문자 편하게 써라. 반말로."

[괜찮아?]

"안 괜찮을게 뭐 있노. 근데 니 타자속도 장난 아이네."

[당연하지 이게 내 입인데.]

"그럼 말은 입모양 보고 알아듣는기가."

[응]

 

신기하다. 잠시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읽고 말하는 방식이 적응되며 자연스러워진다. 

어느 때에는 내가 묻는 속도보다 이레가 답하는 속도가 현저히 빠를 때도 있어 놀라울 지경.

이렇게 되도록 저 아이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물론 그렇다고 나의 오늘밤이 '비정상'으로 흘러가게 놔둘 순 없다. 

이 정도면 친절했고 이만하면 된 거다. 도덕쌤도 친절 다음엔 어떻게 하라고 알려주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그다음부터는 내 맘대로 하면 되는 거고 내 맘은 다시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해 파투를 내는 거다.  


"근데. 여기는 어쩐 일로?" 

[왜. 오면 안 돼?]


차갑게 바뀐 승진의 태도와 표정을 보며 이레도 딱 그만큼 차가워진다. 그건 사람의 미묘한 감정까지 읽을 수 있다는 표시였고 그럴 거라 예상 못한 승진은 단순했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미트에 꽂힌 공의 느낌만으로도 투수의 컨디션을 알 수 있다는 어느 포수의 말처럼 '저 아이' 또한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함을 왜 계산하지 못했을까. 


안 들린다고 못 느끼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감각'이 듣는 이의 귀보다 더 섬세하고 예민하다 느낄 만큼 나의 내면까지 분석당한 기분이다. 결론은 결국 파투를 내고 싶은 나의 패를 들키지 않기 위해 나도 '정상인'들과의 대화처럼 교묘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못 올 건 없제. 내 말은 신이나나 싶어 가. 여그는 음악이 생명인데."


[신나! 오늘 처음 와봄! 사람들이 좀비처럼 움직여]


굳이 일어나 좀비흉내를 낼 것까지야... 

누가 봐도 예쁜 얼굴인데 저런 추함을 마다하지 않을까. 내가 웃길 바라는 건가. 


"야야! 그 참! 맥주 쏟았다! 마! 마! 맥주 쏟았다고!!"


점점 더 과격해진 좀비흉내는 맥주병을 쓰러뜨리고 나서야 끝이 났고, 승진은 테이블 위로 흥건한 맥주거품을 닦으며 '인내심'이 곧 바닥을 드러낼 거란 걸 알리기 위해 보란 듯 인상을 찌푸린다. 


"야, 쏟았음 니도 치워야제 뭐 하는데."

[근데 오빠는 뭐 하는 사람?]


아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건 나나 저 아이나 똑같구나. 


"알아서 뭐할라고."

[궁금해]

"별 게 다 궁금하네. 내는 머. 그냥 학생이다. 대학생."

[우왕 어디 학교?]

"서울....... 에 있는 대학."

[서울 어디? 무슨 과?]

"그냥 서울에 있는 대학이고 철학과 다닌다."

[철학과?]

"철들라고 다니는기다. 내 철드는기 엄마 소원이라..."

[대박 오빠 왼손잡이네!?]


젓가락으로 젖은티슈를 걷어내는 승진의 왼손을 보며 이레는 감동까지 한 표정이다.


"와. 왼손잡이가 왜." 

[나도 왼손잡이거든!] 


같은 왼손잡이라는 게 이렇게 기쁠 일인가. 방방대는 그녀의 왼손을 향해 하이파이브를 하면서도 당최 이해가 가질 않는다. 뒤이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의 시간.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통닭 삼겹살 족발 다 좋아하제."

[우와 나도 초밥 좋아하는데]


초밥도 좋아하지만 지금 초밥을 좋아한다고 하진 않은 거 같은데... 


[나는 AB형. 오빠는?]

"이건 다르네! 내는  A형."

[우와 우리 똑같이 A가 들어가!]


긍정적인 건가 창의적인 건가.


[놀라지 마! 사실은 나도 오늘 생일이다!?]


그건 알고 있었다. 좀 전에 봤던 장애인등록증에 쓰여있던 주민등록번호. 


[우리 비슷한 게 디게 많은 듯! 인연인가 봐!]


청각장애인에게 말이 너무 많다고 하면 실례일까. 아무튼 나는 조용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취향 때문에 쫑을 내려는 거다. 절대 장애인이어서가 아니라. 수다쟁이 그녀로 인해 헤어질 명분이 하나 생겼다. 


"근데 내가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니 진짜로 스무 살 맞나. 생긴 건 고딩도 아이고 중딩인데."


뜯어보면 비율이 좋은 거지 160도 안 되는 키에 양 볼은 젖살이 그대 로고 분이 묻은 솜털들은 엄마의 화장품을 찍어 바른 것 같이 어색한 게 영락없는 꼬맹이 그 자체인데. 물론 미성년자는 아니겠지만 지금 이 아이의 꼬락서니를 한 번은 꼬집고 싶었다.


[나 성인 맞거든!]


어린애 취급을 받는다는 건 여러모로 자존심이 상하겠지. 급 발끈하며 위스키잔을 높이 치켜든다. 

풉. 들고 있는 폼만 봐도 애송이티가 풀풀 나는데 스트레이트 원샷으로 성인인증을 하시겠다? 귀엽네. 

승진은 한 병 남은 스카치 블루를 가득 따라준 뒤 도발하듯 맞잔을 든다.


망설임 없이 들이켠 이레는 도수 높은 알콜의 뜨거운 맛에 눈물이 고인다 그럼 그렇지, 뭐라도 달라는 듯 목과 입을 때리며 파닥대는 손짓에 우유를 따라주자 벌컥벌컥 푸우-  끝까지 비워낸 그녀가 살 것 같단 표정으로 소파에 기대앉자 짧은 치마가 불쑥 올라가며 흰 허벅지와 팬티가 그대로 드러난다. 


"크흡."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양아치다. 하지만 저 아이가 과감한 패션에 어울리는 화장, 어른의 향수를 풍기며 저러고 있다는 가정하에 양아치일 뿐. 술 한잔에 사약을 마신 것처럼 파닥대질 않나 내내 컨트롤이 안되던 미니스커트는 끝내 허리까지 올라가 버리고 입가에 묻은 허연 우유자국은 지울 생각도 없는 저 코찔찔이를 보며 흥분을 느낀다는 건 범죄가 아닐까. 


[맛이 따가워] 


인생의 첫 쓴맛을 삼켜본 소회를 밝히며 소리 없이 킥킥대는 그녀. 

뭐가 재밌는지 한참을 웃는 이레의 입에서 정제되지 않은 파열음이 새어 나온다. 


응어.응어. 응어어.응어.


그 생소한 소리가 적잖이 충격적이어서 승진은 사고가 멈춘 채 다시 멍- 해져버린다.

장난이랍시고 '장애인 흉내'를 내던 상철이처럼 그녀도 그저 흉내 내는 거라 믿고 싶을 만큼.  

예쁘게 생긴 저 '아이'의 소리라는 게 낯설고 당황스러워 담배에 불을 붙이는 척 표정을 가린다. 

 

이레는 담배에 불을 붙이는 승진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바라본다. 그리고 미간의 주름이 독한 담배연기 때문이 아닌 불편함의 신호라는 걸 알아채고 이내 차분해진다. 그리고 '자신'의 무엇 때문에 저 남자의 감정온도가 낮아졌을지 지켜보려는 것처럼 눈을 떼지 않는다. 


"술도 처음 묵는 아가 와 이런 데를 혼자 오는데. 가시내 진짜 겁도 업데이." 


읊조리는 혼잣말. 다행이다. 걱정이었구나. 



첫 특수학교에 등교하던 날 이레는 교실에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며 '나와 같은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았음에 놀라워했고 교탁에 선 선생님은 수어로 말씀하셨다.


'단어'나 '말투'가 주는 정보보다 더 명징하고 정확한 게 '표정'이다. 

표정은 곧 '심정'이며 '심정'을 읽으면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렇게 선생님은 '정상'인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교실에 앉아있던 모두에게 커다란 울림이었다. 이레 역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선생님처럼 '심정'을 보기 위해 노력했던 무수한 나날들이 지나 오늘, 테스트로 찾은 나이트클럽에서 처음 보는 남자와 대화를 주고받는 그 '심정'은 정말로. 두근거렸다.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성공의 두근거림이 아닌, 



첫사랑의 두근거림이었다. 



이레는 자꾸만 튀어나오는 미소를 억지로 감추느라 얼굴이 뒤틀린다. 갈수록 뒤틀리는 이레를 보며 승진은

'고거 마시고 취했나' 또 다른 걱정부터 앞선다. 그렇게 또다시 자신을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이레는 또 수줍어지고. 악순환이 이어진다. 


"니 오늘 여그 오는 거 부모님이 아나? 말해봐라. 아니 문자 써 봐." 

[스무 살부터 내 맘대로 해도 된다고 했음]


복장이 터진다는 얼굴로 일어선 그가 온 더락 잔에 술을 가득 따른 뒤 단숨에 들이켠다. 

안주로 담배 한 모금 빨아 넘기며 자! 봐! 이게 어른이야! 하는 것처럼. 


"맘대로 해도 된다는기 막살라고 하신 말씀이 아이라고! 니 여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아나! 여기는 늑대! 어우우우! 어휴 내가 늑대흉내를 다내네... 아무튼 사슴 같은 아들이 오면 뼈도 못추리는데라! 다시는 이런데 오면 안 돼! 아직 뻐스 다니니까 얼른 가라! 치마도 입지 마! 주체도 몬하는기 뭔 치마고."  


[그럼 같이 나가자] 


뜨끔. 정말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으면 몸 어딘가가 따끔거린다는 걸 승진은 처음 느낀다. 


"내가 왜."

[위험하다며]

"아니이 너가 위험하다고 나 같은 나쁜 늑대 놈들 때문에!]

[나쁜 놈 아니야 오빠 디게 좋은 사람이야]

"그...래...? 도 안 돼. 내는 못 가. 친구들이 기다린다."


더는 받아주면 안 돼. 손수 문까지 열며 나가라는 제스처를 보이자 이레는 레드카드를 내미는 심판처럼 승진의 얼굴을 향해 휴대폰을 치켜든다. 


[그럼 나도 딴 방 갈래! 흥!]

"가시내 사람 말을 뭐로 듣고! 일롸 일롸!! 야!"


"나 지금 화났다"라는 걸 쿵쿵 걸음으로 보여주는 그녀가 너무도 아이 같아서 승진은 짜증이 난다. 따라가서 혼을 낸 다음 밖으로 내보낼까. 아냐 내가 뭐라고 오지랖을... 그렇다고 말도 못 하는 애를 저렇게 놔뒀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어떡하지? 팔자에도 없던 여동생이 나타난 기분이다. 


"새끼 혼자 있는 거 보이 뺀지 묵었네 맞제!"


내면의 싸움을 벌이는 동안 '말 많던 아이'는 긴 복도를 지나 사라져 버렸고, 

꺾인 코너에서 타이밍 좋게 튀어나온 상철이 어른여자 둘을 데리고 온다. 


"내 그랄줄 알고 예쁜 언니들 델꾸 왔거든! 언니야 소개할게! 내 친구 최승진! 서울대 다닌다!" 


저 자식은 틈만 나면 나의 학벌을 떠들며 환심을 사려 든다. 그게 참 부끄럽지만... 


"나 서울대 첨봐! 오늘 오빠랑만 놀 거야!"


싫지만은 않네... 먹고 들어가는 게 있는 만큼 쉬운 길은 없지. 그래. 다 잊고 나도 이제 너랑만 놀 거야. 

다시 '정상'이다! 유후- 




훈민정음- 훈민정음- 비읍 시옷!


병신! 

방석! 

빙수! 

저 오빠 또 렉 걸렸네! 

서울대 맞아? 

아 재미없다...

 

벌주를 내 입 가까이 가져다 대며 '도대체 오늘 와이라는데!!'라는 상철의 협박성 찡그림을 보면서도 나는 그녀의 막혀버린 귀를 떠올리고 있다. 집중하려 할수록 이들의 목소리는 아득히 멀어지고 그 아이는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들로 복잡해진다. 


"승진아 정신 차리라! 저 언니들 가뿌면 오늘 끝이데이!"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다. 물밀듯 밀려오는 상념들이 제어가 되질 않는다. 

알고 나면 보이고 보이고 나니 신경 쓰이는 엄마의 손과... 막혀버린 귀가... 맴돌고 맴돈다. 


훈민정음~ 훈민정음~ 이응 리을! 


오리! 

의리! 

이레! 

잠깐. 이레가 뭔데.

이레가 뭐냐고.


모두가 '이레'를 외친 승진을 보며 어서 빨리 해명하지 않으면 방금 탄 벌주를 또 마시게 될 거야란 기세로 달려든다. 그러게... 이레가 뭘까. 도대체 '그 아이'는... 뭘까. 모르겠다. 오늘은 더더욱. 모르겠다.


뛰쳐나와 복도를 달리고 여러 개의 룸을 뒤지며 어지러운 스테이지를 헤맬수록 머릿속은 뒤죽박죽곤죽이 되어버린다. 달리고 달려 문 닫은 어느 가게 앞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야 멈춰지는 다리. 없다.

집에 갔겠지. 담배에 불을 붙이려 고개를 숙이자 맺혔던 땀이 담배 끝을 적신다. 더운 8월이다. 너무 더워서... 

집에 갔을 거야. 아무 일 없이... 


오늘은 나도 집에 가서 엄마랑 수박이나 쪼개 먹어야겠다.


장초가 꽁초가 될 때까지 딱 진정할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승진은 클럽이 아닌 도로가로 향한다. 늦었지만 엄마랑 같이 케이크도 자르고 촛불도 불고 '건강하게 나아줘서' 고맙단 말도 해주고 싶다. 기분 좋은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택시를 기다리며 또 하나의 담배를 입에 문 승진은 건물과 건물틈의 어둠에서 새어 나오는 질척한 웃음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뭐."


쇳물도 녹일 만큼 더운 날 굳이 저런 틈바구니에 뭉쳐있는 남자들을 보며 승진은 의아해할 뿐이고, 

그곳에서 뭉쳐있는 또래의 사내들은 따갑게 쳐다보는 승진의 시선이 거슬릴 뿐이다.  


"뭐. 뭐냐고."


찰나 승진 앞에서 멈춰진 택시가 클락션을 울린다. 


"안 탑니꺼!"

"예? 예... 못 타요."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던 담배꽁초가 달달 떨린다.


'혹시 지금 몇 시예요' 

'몹시 흥분이요' 


같은 어처구니없는 개그처럼 그토록 찾아 헤맨 저 아이가 저들의 다리 사이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어처구니라면 저들의 음흉한 눈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몹시 흥분이다. 


"뭐 하냐......... 이 양아치새끼들아......."

"갈 길 가요 시비 털지 말고."


이레에게 다가가려는 그를 가로막자 욕설을 주고받는 험악한 대화가 이어진다. 저쪽에서 맹- 한 얼굴로 휴대폰을 보고 있던 이레는 승진을 발견하자 하굣길에 마중 나온 오빠라도 본 것처럼 손을 흔든다. 아무것도 모른채화색이 도는 그녀를 보자 더더욱 음흉한 눈빛을 주고받던 요놈들이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마, 싹 다 일로나와." 


엄마는 몸서리를 치며 싫어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큰 키에 벌크 업된 근육질의 몸과 빨갛게 물들인 반삭발의 헤어스타일은 큰 도움이 되고.  


"누구세요."

"저희 알아요?"

"뭔데 와서 시비를 터는데요."


호기롭게 다가오지만 이미 저들도 '겁'을 먹고 있다. 느껴진다. 느낌이 틀렸어도 상관없다. 다구리에 장사 없듯 3대 1은 후달리나 나는 인텔리 한 '양아치'로써 정의구현을 실행하는 상위호환버전이기에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다. 목을 꺾고 침을 뱉으며 힘껏 어깨를 편 뒤 내려다본다. 


"왜 그러는데요."

"우리 알아요?"

"몰라도 알제. 뻔한 새끼들 아이가."


예쁘니까 들이댔을 거고 청각장애인임에 충격은 좀 받았겠지만 그럼에도 짐승 같은 본능이 앞서 어리숙한 저 아이를 이곳까지 데려와 설득했을 거다. 재밌는데 가자고. 같이. 놀자고. 


"와 자꾸 반말인데 씨 X 놈이..."

"아니 잠깐만. 이라는 이유가 뭔데?"


아무리 숨기고 참아도 인간의 본능은 결국 짐승과 같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시간.

오늘은 폭력의 본능을 참지 못한 짐승과 성욕의 본능을 참지 못한 짐승이 만난 거다. 

이유가 그래. 그래서 때리는 거고 그래서 맞는 거야. 


'마! 최승진 니 뭐 하는데!" 


희미한 바람에도 맥없이 흔들리는 머릿결을 보니 멀리서 봐도 상철이다. 


"안냐쓉니까!" 

 

이건 또 무슨 상황. 좀 전까지 꼿꼿하던 양아치들이 구십 도가 넘는 인사로 예를 갖춘다. 


"뭔데."


눈치 빠른 상철은 눈깔이 돈 나의 상태를 보자 곰새 딱딱해진다. 


"와 그리고 섰니. 늬들 설마 내 친구한테 시비 턴 거 아이지? 뒈진다."


세월이 흘렀어도 상철이는 여전히 후배들에게 전설로 남아있나 보다. 


"그기 아이고예. 저 행님이 먼저 시비 털었다 아입니꺼."

"쩌그서 담배 피우고 있는데 갑자기 와가 째리고 멱살 잡고 그랬심더."

"맞나, 승지이 와 그라는데. 얼라들 내 후배거든 착한 아들이다. 그러지 마라."


착해? 저것들이? 든든한 뒷배라도 생긴 것처럼 표정을 푸는 저놈들이 오늘 저질렀을 끔찍한 짓거리를 생각하면 아무리 후배라도 허허 웃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대가는 확실히 치러야 다시는 안 그러지. 


상철이 말리고 저들이 뒷걸음질 쳐도 승진의 주먹은 쉽게 펴지지 않는다. 그렇게 뜯고 말리는 몸싸움이 조금씩 과격해질 즈음 뭐가 민망한지 일부러 뒤뚱뒤뚱 걸으며 다가온 이레가 그의 주먹을 감싸 쥔다. 입을 쭈욱 내민 채 촉촉해진 눈가를 축 내리까는 그녀. 그 순간에도 승진은 해코지라도 당했나 싶어 이레의 이곳저곳을 살핀다. 


[집에 갈래]


겁을 먹은 표정으로 승진에게만 보이게 휴대폰을 가까이 들이민다. 혹여 싸움이라도 나면 어쩌지란 초조함에 발을 구르고 애교를 피우며 나의 팔을 끌고 가는 이레를 보니 힘이 빠진다. 우연히 만나 반가웠을 테고 갑자기 싸움이 붙으니 무서웠겠지. 지금 짓는 표정은 저들이 겁나서가 아니라 싸우려는 내가 무서운 거다. 

싸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겁.


"마! 최승진이! 어디가!"


쫄래쫄래 앞장서는 이레의 뒷모습을 보며 세 양아치는 얼이 빠져버린다. 

곁다리로 서 있던 상철 역시 그 뒤를 바보처럼 따라가는 승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택시를 타고 내린 동래의 어느 감자탕집에서 이레는 만두를 먹고 있다. 만두를 시켰다기보다 이레가 들어오는 걸 유심히 지켜보던 사장이 시키지도 않은 만두 두 접시를 무심하게 놓고 간 거다. '나'에게 상당한 경계를 보이면서.   


"어이. 자네는 누고."

"저... 저요?"

"이레랑 무슨 사이?"


사장님의 반말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건 그의 팔뚝이 무시무시해서다. 


"친군데예..."

"친구. 끄응..." 


위아래로 훑어본 뒤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신음소리를 내며 카운터로 돌아간 사장은 대놓고 나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중이다. 볼이 미어터지도록 만두를 욱여넣고 있는 이레에게 '잘 먹네' 란 칭찬도 하고 먹지도 않았는데 이 집 만두 맛있네! 박수를 치며 '나는 아군입니다'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지만 사장의 레이저는 여전히 내 뒤통수에 고정된 채 언제든 쏠 준비를 하고 있다. 


"혹시... 저 사장님이 너네 아빠니?"

[아니]

"그럼 그냥 자주 오는 가게구나?"

[응. 사장님 좋은 사람]


너에게만 좋은 사람이겠지. 그나저나 기름이 번들거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만지작대고 옷에다 슥슥닦고 생긴 걸 떠나하는 짓도 일곱 살 꼬맹이다.  


"마 드럽게 손을 어디다 닦노! 손으루 묵지 말고 젓가락으로 묵어! 다 흘린다 다 흘려! 접시에 받치가 무라!"


끄응- 하는 소리를 저렇게나 크게 내는 건 나의 호통이 사장님의 심기를 건드린 거겠지? 나는 그저 이레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왜? 때마침 걸려오는 상철의 전화. 그 핑계로 슬그머니 나와 사장의 레이더망에서 벗어난다.


"마, 후배들이 그러는데 그 여자가 그 구석뺑이서 울고 있더래.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말도 않고 울기만 해서 도와줄라꼬 하는데 니가 음흉한 눈빛으로 오더니 그 아를 막 데려갈라꼬 해서 막은거라데. 니 임마 그 여자가 아무리 예쁘고 그래도 그건 강간이다. 니 고마 후배들한테 이미지 개쓰레기 돼뿌써! 퍼뜩온나!"


뚝. 


이레를 도와주려 한 상철이의 후배들을 나는 양아치로 보았고, 

그들은 구해주려 한 나를 쓰레기로 보았다. 정말 이상한 밤이다.  


유리창 너머 이레는 식탐 많은 아이처럼 여전히 잘 먹고 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며 빨리 들어오라 손짓을 한다.

아니, 이대로 갈 거야. 반대 방향으로 한걸음 내딛으려는데 끄응-

저 소리가 어떻게 두터운 유리창을 뚫고 내 귀에 꽂힐 수가 있지? 

들어오라는 사장의 고갯짓에 승진은 허리를 굽힌 내시처럼 종종종종 들어간다.


[먹여줘]


앉자마자 보여주는 이레의 문자. 

승진은 이레에게만 보이도록 얼굴을 가린 뒤 앞니를 드러내고 눈을 부라린다.  


"마, 니가 무라. 얼라도 아이고."

[문자 써야 되니까 손이 모자라]

"그럼 문자 쓰지 말고 머거!"

[싫다]

"장난하나, 내 시간 없다고 빨랑 가야 된다 퍼뜩 무라."

[그러니까 먹여달라고]

"마, 데려달라 해서 왔고 배고프다해서 왔제. 내는 할 만큼 했으니까 니도 적당히 좀 해라." 


성질이 난 이레가 먹던 만두를 접시 위로 집어던진다. 요것 봐라.

때마침 손님이 들어오며 사장이 카운터를 비운다. 기회다! 

승진이 때린 딱밤에 이레의 눈에서 불빛이 번쩍인다. 

 

"가시내 딱 보니까 오냐오냐 응석받이로 자란 모양인데 내는 택도 없거든! 어데 싸가지 없이 음식을 던져!"


운다. 스무 살이나 먹은 애가 딱밤 좀 맞았다고 119 사이렌보다 더 크게 운다. 메뉴판을 보이며 손님을 받던 사장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주방에 있던 이모들이 쪼르르 달려가 사장에게 귓속말을 하며 딱밤흉내를 내보인다. 아아. 이런 걸 나와바리라고 하는구나. 전진 한가운데에서 내가 적장의 딱밤을 때렸구나. 감히.


어느새 사장과 이모들에 둘러싸인 승진은 눈을 질끈 감는다. 




콘아이스크림을 아그작대며 나란히 걷고 있는 이레. 

핸드폰을 얼굴에 붙인 채 승진을 바라보고 있다. (핸드폰 액정에 신나^^)라고 적혀있다.       


"뭐가. 대체 어느 부분이 신나는데."      


기가 쪼옥 빨린 얼굴로 터벅터벅 걷는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와 거서 울고 있었노. 집에 안가고."

[몰라]

"그래,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그때는 어둡고 흥분해서 보지 못했지만 무수한 손자국들이 이레의 팔과 목에 벌겋게 새겨져 있다. 상철이의 후배들을 만나기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지만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잘 도망 나왔고 잘 숨었다가 나를 만났으니 된 거다. 이레가 초콜릿이 묻은 콘의 꼭지 부분을 승진의 입에 쏘옥 넣어준다.


"내 긴 말 안 할 테니까 다시는 밤에 혼자 싸돌아다니지 말그래이 알았어? 내 이 말하려고 이까지 온 거다. 

한 번만 더 그런 데서 만났다가는 확! 맴매맴매! 알았어?!" 

  

[나 철학 좋아해]

"와 또 갑자기 생뚱맞은 소릴 하는데." 

[오빠 철학과잖아]

"됐다. 내는 철학 싫어한다."

[왜?]

"철학과 다닌다고 철학 좋아해야 되나."

[그럼 나도 싫어해]


서툴다. 사람 마음은 무턱대고 들이댄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오지랖은 여기까지. 


"집이 어디고. 멀었나." 

[여기]


이레가 가리킨 건 높은 담벼락이 둘러져 있는 이층 단독주택. 집이 아니라 성이다. 


"와!!!! 니네 집 억수 좋네! 아부지 뭐하시노!!!!"

[연락해도 돼?]


순간,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다가와 눈을 꿈벅이는 그녀를 보자 승진은 허리를 곧추 세우며 꼿꼿해진다. 

아... 아무리 그래도 연락은 싫은데. 좋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공일공.이사칠구..."


거대한 현관이 자동으로 열리며 이레는 그 앞에서 손을 흔든다. (손에 쥔 휴대폰에 연락할게라 쓰여있다)

승진도 멋쩍게 한쪽 팔을 들어 보인다. 철컹하며 현관문이 닫히자 돌아서서 만세를 부르는 그. 


"아직 클럽이제! 곰방 간다!" 


다시 '정상'의 밤을 향해 힘껏 달린다. 




"아들-! 오늘 출근한다 안켔나."


방문을 연 엄마가 코를 움켜쥐며 다시 닫는다. 


"술냄새 발냄새 땀냄새!! 이기 사람 냄시맞나!!"


늘어진 하품을 하며 승진은 돌아눕는다. 몰라, 출근은 내일부터 해야겠다. 


"퍼뜩 씻구 밥무라. 미역국 끓있다!!"

"생일 지났다!! 뭔 미역국이고!!"


악 좀 썼다고 두통이 밀려온다. 지긋지긋한 숙취. 

머리를 벅벅 긁으며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을 확인한다.  AM 11:00.

30분만 더 자야지 싶은데 띠링- 띠링- 띠링-  

아까부터 울려오는 문자음에 다시금 휴대폰을 들어 폴더를 열어본다. 


안 읽은 문자 1354 


뭐? 띠링- 띠링- 띠링- 띠링- 한 번 몰아치는 폭풍문자음에 덜 깬 눈을 비비고 초점을 맞춰본다.


[점심은 오므라이스!]

[참새가 날아다녀]

[줄넘기하는 아저씨]

[있다가 노래방 갈래?]

[이마에 혹났어]

[엄마가 때린 사람 혼내준대]

.

.

.

.

안 읽은 문자 1370통


돌았나 이기!! 술과 잠이 동시에 깨며 벌떡 일어선다. 

또다시 시작된 폭풍문자음과 함께 읽은 문자의 개수는 빠르게 올라가고. 

승진의 혈압도 그만큼 솟구쳐 오른다. 


3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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