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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Feb 15. 2021

코로나, 다시 햇살로

  퇴근길 라디오에서는 한대수가 ‘행복의 나라로’를 부르고 있었다.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그저 햇빛 하나만으로 행복하다는 가사는 결핍과 갈망 가득한 마음 연못에 파장을 일으킨다. 늘 거기 당연한 듯 있던 것들이 이토록 절실해지고 나니, 디오게네스에게 햇살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구나 싶다. 그를 불쌍히 여긴 알렉산더 대왕이 뭐든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당신 그림자 때문에 햇볕이 가려지니 조금만 비켜 달라.” 말했다는 그리스 철학자는 햇살 한 자락의 귀함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았던 것일까. ‘소중’한 것은 ‘귀중’하다는 사실을, 소박함의 고귀함을 뒤늦게야 우리는 깨치고 있다.

    

  지난 1년간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린 그 단어, 코로나는 원래 태양의 다른 이름이다. 태양 표면의 대기현상을 가리킨다고 하니, 우리말로는 ‘햇살’ 정도 되겠다. ‘햇살’이 ‘바이러스’로 변해버린 오늘의 세상은, 어쩌면 평소 눈에 띄지 않던 것들에 대한 감사를 잃고 잊은 채 살아온 대가인지도 모르겠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우리 마음속 햇살까지 빼앗아 갔다. 그리고 소소하되 확실하던 행복들마저 마스크에 덮인 지금, 햇살이라는 이름의 바이러스는 행복이냐 불행이냐의 차원을 넘어 소시민들의 생존까지 뒤흔들고 있다.     


  막걸리 한 사발 같은 한대수의 목소리가 잦아들 무렵, 차에서 내려 바라본 구도심 시장 어귀는 날씨보다도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불 꺼진 골목, 귀퉁이 청테이프 한쪽이 뜯긴 ‘폐업 정리, 점포 임대’ 종잇장은 찬바람에 흐느끼며 나부꼈고, 텅 빈 가게 앞에 우두커니 앉아 담배를 문 가게 주인의 딱딱한 표정은 체념까지도 초탈한 듯 보였다. 그 무겁고 쓸쓸한 풍경을 가슴에 담으며 장을 본 후 들어선 집은, 그러나 부끄럽게도 따뜻했다. 그리고 보일러가 데우고 있는 집안 한구석 냉장고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시끄러웠다.     


  영하의 바깥 찬바람과 사투를 벌이며 보일러는 더 뜨거워지려 하고, 방안의 냉장고는 그에 맞서 품 안의 것들을 차갑게 지키려 더 빠르게 모터를 돌리고 있었다. 그래, 아이러니하게도 사는 게 다 ‘밀당’이지. 세상 모든 것들은 긴장과 길항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 싸우고, 밀고 당기는 가운데 전진하는 정반합의 작동, 그 변증법 이치 아래 인간은 세상을 한 걸음씩 걸어왔다. 도전은 응전을, 응전은 자기 성찰과 개량을 잉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극복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이번에도 우리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     


  비는 반드시 그치고 그 뒤에 땅은 더욱 단단해지듯, 아픔은 상처를 남기지만 상처는 아물며 새살을 돋게 한다. 당장의 처절함 속에서 지금은 얄밉고 가혹하게 들리는 이 글귀가 그래도 조그만 위로이자 커다란 용기였으면 좋겠다. “항상 맑으면 사막이 된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야만 비옥한 땅이 된다.”는 스페인 속담처럼, 도무지 피할 수 없었던 이 비바람이 어서 그치고 그것을 견뎌낸 대가로 우리네 삶이 한층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해본다.     


  부디 하루라도 더 빨리, 이 비가 끝났음을 알리는 무지개가 하늘에 걸리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평범하고 소박하던 작은 일상에 다시 한 줌 햇살이 비치기를, 그 햇살을 기다리는 이 땅의 모든 디오게네스들에게 희망의 봄이 찬란하게 한 걸음씩 다가오기를 뜨겁게 소망한다. 그리하여 소망한다. 코로나가, 바이러스가 아닌 햇살이라는 원래 뜻을 되찾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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