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inon Feb 17. 2021

작가(作家), [작]지만... [가]능성

브런치 작가가 된 후, 첫 글

#1. 사냥과 박제(剝製)     


  한글 새 창을 연다. 심호흡을 한 번, 키보드에 두 손. 생각의 흐름 속, 손가락이 추는 탭댄스 리듬을 따라 깜빡깜빡 커서가 달려 나간다. 가끔씩 백-스페이스 키의 문-워크는 수동변속 기어나 브레이크 느낌이다. 쏟아지는 인식과 감각들을 행여 놓칠세라 속도는 점점 빨라지지만, 화면 속 백지는 텅 빈 고속도로. 나 혼자 달리고 있잖아! 제한속도도 단속 카메라도 없기에 마음 편한 질주는 계속된다.

     

  컴퓨터가 없었다면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연필로는 도저히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사고(思考)의 조각과 이음쇠들은 즉시 활자로 붙들어 두지 않으면 휘발되고 만다. 어찌 보면 글을 쓴다는 것은 좀 잔인한 작업이다. 무형(無形)인 채로 머릿속을 자유로이 떠다니는 무엇인가를 낚아채 끄집어낸 다음, 글자로 고정시키는 과정은 사냥과 박제(剝製) 같기도 하니 말이다. 차분한 연필 글쓰기가 사각사각 종이 위에 생각을 재배하는 농사짓기와 같다면, 타이핑 글쓰기는 그러고 보니 사냥을 닮았다.     


  사냥의 목적은 섭취다. 뇌리를 스치는 느낌과 생각들을 잡아서 요리해 내면 누군가의 진수성찬... 까지는 안 되더라도 가벼운 간식으로는 족하지 않을까 싶다. 뭐 그리 대단한 사상을 담은 명문장이 아니면 어떤가. 단 한 사람이라도, 설령 사냥꾼 저 혼자서라도 읽고 그 나름의 무엇인가를 느끼거나 깨닫거나 즐길 수 있다면, 오늘 사냥은 공치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고 박제 역시, 사냥꾼 스스로를 위한 덤이다. 아무리 허접할지언정 최소한 그 자신에게만은 보존하고 되짚어 감상할 가치가 있을 테니까. 그래서...     


  쓴다는 것은, 1차적으로 자급자족과 자기만족을 위한 사냥과 박제 작업이다.          


#2. 마우스 앞 풍선껌     


  사냥꾼은 외로웠다. 그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바람.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조촐한 밥상 앞에 앉아 주었으면...” 산해진미로 차린 7성급 호텔 셰프(chef)의 요리는 못되지만, 그 어떤 누군가 단 한 사람에게라도 느낌이나 즐거움이라는 샌드위치 한 조각을 건네고 싶은 소망은 이내 어렵사리 작은 용기가 되었다. 하지만 ‘브런치’의 문 앞에 선 어설픈 펜잡이, 아니 키보드잡이는 참으로 쭈뼛쭈뼛함 그 자체였으니... 짧은 자기소개와 졸고 3편 등록 후 작가 신청 버튼 마지막 클릭 앞에서 다시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냥 부끄럽고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헤아려 봐도 탈락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데... 이거 괜한 삽질 아닌가...     


  최후 클릭을 미루고서 찾아 읽어본 ‘브런치’ 작가 선정 혹은 탈락 후기들은 얼치기 사냥꾼을 더욱 주눅 들게 했다. 내로라하는 글쟁이들도 2전 3기, 3전 4기 끝에 간신히 통과했다는데, 제대로 된 쓰기 수업도 훈련도 경험한 적 없이 그저 제 멋대로 써댄 글을 과연 받아나 줄까. 회의(懷疑)와 열등감은 풍선껌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풍선껌은 풍선껌. 마구 커지다 보니 제풀에 지쳐 못 버티고 탁 터져버렸다. 제법 흔했던 경험이자 나름 의외의 효과가 있는 방법이다. 전전긍긍 근심이 극에 달하면 어느 순간엔가 될 대로 되라는 배짱으로 180도 돌변하는 법. 망설임이라는 풍선껌이 터지자 ‘안 되면 마는 거지’ 중얼거림과 함께 검지는, 딸깍 마우스를 때렸다. 그리고 이틀 뒤. 2021년 2월 15일 오후 4시 14분.     


  메일함 알람이 울렸다.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3. 쓴다는 것누군가에게 무엇이 되는 것.     


  1991년, 어느 중3 소년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작가 예반(Javan)은 철학자도, 전문작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회사원이던 그가 적어 엮어낸 글들은 평범하고 소박했기에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얇고 여백이 많은 그의 책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 속 짧은 문장들에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따스하면서도 정교한 시선이 가득 차 있었다. 어쩌면 그때, 소년은 이름 없는 작가의 꿈을 마음 한 구석에 심었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모르게.     


  한 줄 글을 쓴다는 것은, 온갖 반어법들로 묘사가 가능하지 싶다. 손가락은 경쾌하지만 어깨는 무겁다.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느끼는 뼈까지 녹는 극치감. 수줍게 꺼내는 두 손이 내심 은근 자랑스럽기도 하고, 때로 마음속 슬픔을 조각해 종이 위에 세우는 과정은 오히려 즐거운 이 아이러니.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의 가장 큰 의미는... “누군가에게 작은 무엇이 된다.”는 것.     


  창문 커튼을 지나며 한결 부드러워진 늦은 오전의 햇빛 같은 글이 되고 싶다. 가볍고 간단한 브런치. 누군가 그 은은한 햇살 아래서 즐길 한 조각 샌드위치 같은 글. 소소한 사유(思惟)의 멋없는 고백이 누군가의 아침 커피 곁 비스킷이 되기를 소원한다. 그리 대단치 않은 재료와 서투른 솜씨로 빚어내는 소박한 요리가 누군가의 요기가 되고 입맛이 된다면 키보드를 두드리는 얼치기 사냥꾼은 그 하나로 그냥 기쁠 뿐이다. 예반(Javan)이 말했듯이, 모든 사람에게 그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그 누군가에게 그 무엇이 되고 싶을 따름이다.          


#4. 작가(作家), []지만... []능성     


  음악과 영화가 전파를 타고 휙휙 공중을 날아다니는 첨단의 시대에, ‘글’이 갖는 가치는 예전만 못하다는 푸념도 그럴 법하다. 하지만 영상이 세상을 점령하고 유튜브가 인터넷을 장악한 오늘날에도, ‘글’은 그 모든 콘텐츠들의 뿌리로 여전히 굳건하다. 드라마나 영화 속 배우의 연기와 카메라 워크를 비롯한 모든 연출도 그 출발은 시나리오의 활자다. 음악도 마찬가지. 바흐도 방탄소년단도 오선지가 시작이다. 이토록 스마트한 시대를 일궈낸 것은 ‘생각’의 힘이며, 사람의 ‘생각’이 영상이든 뭐든 되려면 우선 ‘기호화’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


  때문에 인류가 멸망하거나 아메바로 퇴화하지 않는 한, ‘글’은 결코 죽지 않는다. ‘글’과 거기 담긴 ‘생각’들은 세계를 전진시키는 엔진이다. 그 나아가는 방향이 더 좋은 곳인지, 과연 더 나은 길이 무엇인지를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무수한 작가들의 글과 생각이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괜찮은 곳으로 만들어간다는 사실이다. 마치 직소 퍼즐(Jigsaw Puzzle)처럼, 수없이 많은 작가들... 그 [작]지만 셀 수 없게 많은 희망의 [가]능성 조각들이 모여 만드는 작품이 이 세상이다.     


  작가 플랫폼 ‘브런치’의 방 한 칸이 허락되기는 했으나, 아직 ‘작가’라는 호칭은 과분하고 쑥스럽다. 몸에 맞지 않는 그 큰 옷, 당장은 감히 입을 수가 없다. ‘브런치’ 서랍에 더 많은 글들이 쌓일 때까지는, 아직도 어설픈 ‘생각’과 서투른 ‘표현’이 좀 더 깎고 다듬어지기 전까지는, 아직은 얼치기 생각 사냥꾼으로 더 부지런해야겠다. 지금은 그저,     


  “[작]지만... [가]능성”이라고 스스로를 여기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 다시 햇살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