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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Apr 08. 2021

병아리, 병아리, 병아리...

#1. 병아리상처를 대하는 시선의 자세

     

  사무실 옆 도로 건너편에는 보육원이 하나 있다. 평일 아침 등교 준비에 분주한 아이들의 수선거림은 삐약-삐약 병아리를 닮았다. 하교 후 계단을 오르내리며 노니는 삐약이들의 가위바위보 외침. 휴일 오후에는 보육원 선생님들과 배드민턴도 즐기나 보다. 바람을 가르는 라켓과 셔틀콕의 경쾌함까지 그대로 길을 건너온다.  

 

  어느 화창한 날 오후, 잠시 밖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멈칫했다. 예닐곱 살 아직 혀 짧은 목소리들. “여보! 나 왔어! 얘들아! 아빠 왔다!” 병아리들의 소꿉놀이 소리는 그날의 하늘보다 더 밝고 산뜻했다. 듣는 이는 괜스레 안타깝고 슬퍼지려 하는데, 정작 여보와 아빠를 부르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구김 하나 없이 해맑았다.

     

  ‘결핍마저 즐거운 놀잇감이 되는 상황이 아프고 당황스러웠다.’고 말하자, 친한 동료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부재(不在)를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자연스럽거나 담담하거나 한 거지. 그냥 걔들은 엄마 아빠 놀이를 하는 것뿐이야. 정작 걔들을 불쌍하게 느끼는 네 시선이 아이들을 정말 불쌍하게 만드는 걸지도 몰라.”     


  그렇구나! ‘바라보는 시선으로 대상의 감정과 본질을 함부로 단정함’은 자칫 왜곡이 될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왜곡은 동정이나 공감이 아닌 무례함이나 모욕이 될 수도 있겠구나. 결핍을 결핍이라 느끼지 않는, 혹은 무덤덤하게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그래서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오후의 소꿉놀이를 즐기는 병아리들에게, 감히 내가 동정이라는 것을 해버렸구나. 주제넘게도.     


  지하철 역 입구에서 종종 마주치는 걸인들. 한껏 몸을 엎드린 채 야윈 두 손을 벌린 그들을 볼 때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러나 불쌍하다는 느낌이 넘쳐난 저 혼자만의 감상에 젖어 그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 외려 그 측은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그들에게는 살갗을 찢는 비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것. 행여 그가 굶주렸을까 걱정스럽거든, 그냥 무심히 지폐 몇 장을 살짝 놓고 짐짓 못 본체 지나가는 것이 그 걸인을 위하는 예의 서린 보탬이지 않을지.     


  감히 오지랖 넓게 슬픈 마음을 투영(投影)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상대의 상처에 내가 아프다고, 굳이 그 아픔의 느낌을 상대에게 가르치려 하지 말라. 때로는 드러내는 동정이나 공감이 아닌 따뜻한 침묵이, 때로는 관심이나 시선이 아닌 담담하게 ‘못 본체함’이, 때로는 ‘나의 감정이 아닌 너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 상대의 상처를 보이지 않게 어루만지는 마음의 반창고라는 사실을. 봄날 오후 소꿉놀이 병아리들은 가르쳐주었다.     


#2. 병아리축복과 부활의 공존     


  두 병아리가 두 병아리를 보면서 귀엽다! 예쁘다! 탄성을 연발한다. 7살, 4살 두 녀석은 시골 양계장에서 데려온 청계 병아리 두 마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병아리가 병아리를 바라보는 눈빛과 미소만큼 천진하고 난만한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러면서 또 한편, 아빠의 마음은 두 병아리에게 속삭이고 싶어 진다. “엄마 아빠가 있는 걸 감사하라고는 않겠어. 하지만 세상 모두가 다 엄마 아빠가 곁에 있는 건 아니라는 것도 너희가 알았으면 해.”라고 할 뻔하다 도로 삼킨다. 아직 그 뜻도 이해 못할 아가들에게는 너무 이르기 때문만이 아니다. 굳이 가르칠 필요는 없다. 커가면서 스스로들 깨우치겠지. 아무튼...     


  부활절에 데려왔다는 이유로, 그 두 아가 청계의 이름은 각각 ‘축복’이와 ‘부활’이가 되었다. 병아리들에게 이름을 선물할 생각조차 못했던 무심한 아빠는, 그 이름들을 듣고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진다. 아주 멀지 않은 어느 날에, 두 어린 딸들이 ‘축복’이와 ‘부활’이의 마지막을 보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자연이 정한 제각각의 평균수명 차이는 가슴 아픈 이별을 필연으로 만든다는 이치. 새삼 그것을 다시 절감하자, 그 헤어짐의 운명을 짐작도 못한 채 병아리들을 어루만지는 두 아가의 반짝거리는 눈빛이 못내 미안하게 느껴진다. 병아리를 괜히 사 준 건가... 하필 이름은 또 왜, ‘축복’과 ‘부활’인 건지...     


  어머니는 두 손주 병아리들의 얼굴을 모른다. 첫 아이가 태어나기 불과 넉 달 전에 세상을 등져버린 어머니는, 두 녀석의 반짝이는 눈빛도 까르르 웃음도 영영 마주하지 못한다. 흘릴 만큼 이상으로 흘렸기에 이제는 거의 말라버린 눈물인데도, 두 딸아이의 얼굴 속에서 문득 어머니의 흔적을 살필 때는 다시 눈가가 시려진다. 떠나기 전에, 이 두 병아리의 삐약삐약 애교 한 자락이라도 마음에 담고 가지 그러셨소. 어머니...     


  아이들이 태어나던 두 순간에는, 저절로 두 손이 모아졌다. 없던 종교도 생길 수밖에 없는 순간. 나를 닮은 한 생명이 세상과 처음 만나는 순간을 ‘축복’으로 맞이하던 그때, 간절한 마음은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 품에 안고 눈을 맞추던 순간에는, 딸들의 얼굴 속에서 어머니의 표정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래... 피는 못 속인다더니. ‘부활’은 탄생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구나.     


  그렇게... ‘축복’의 순간은 곧 ‘부활’의 순간이었다. 축복과 부활은 그렇게 함께 손을 잡고 다가왔다. 두 병아리 같은 딸아이들이 ‘축복’이와 ‘부활’ 이를 떠나보내며 죽음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될 어느 날은, 슬프지만 반드시 찾아올 것이고... 더 많은 시간이 지나서 이 두 녀석이 자신들을 똑 닮은 아가들을 처음 품에 안게 될 또 다른 어느 날에는, (그때 세상에 있을지 없을지 지금은 알 수 없을) 아빠의 모습을 살펴 찾아보게 될 것이다. 모두의 축복 속에 태어날 손주의 얼굴 안에서, 마치 내 어머니가 그랬듯이, 어쩌면 나도 부활할 것이다.     


  그래서, 삶은 죽음보다 강한 것인지도 모른다. 탄생은, 죽음을 뛰어넘어, 사라졌던 생의 흔적을 다시 불러오니까... 그리하여 만남은 이별로 이어지고 이별은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3. 병아리날아라 병아리     


  너무도 빨리 세상을 떠난 故 신해철의 음악적 전성기는, (감사하게도!) 내 사춘기에 걸쳐 있었다. 1988년 대학가요제, 그의 음악이 탄생하던 그 순간. ‘그대에게’를 열창하던 그를 본 순간부터, 12살 소년은 영원한 팬이 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많이 음악을 듣는다는 10대와 20대를 내내 그와 함께 했다. 그리고 ‘마왕’의 많은 벗들이 그러했듯이, 그가 작고한 2014년 늦가을 내내 나 역시 그의 음악 속에 빠진 채로 한동안 슬픔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개인적으로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최고로 꼽는 신해철의 명반 1번은 <The Return of N.EX.T Part I: The Being>이다. 1994년 고3 여름, 학교 자습실에서 CD가 닳도록 수백 번 들었던 그 앨범의 모든 곡들은 별보다도 빛난다. 그중 다섯 번째 트랙.


 ‘날아라 병아리’     


육교 위의 네모난 상자 속에서

처음 나와 만난 노란 병아리 얄리는,

처음처럼 다시 조그만 상자 속으로 들어가

우리 집 앞뜰에 묻혔다.

나는, 어린 내 눈에 처음 죽음을 보았던

1974년의 봄을 아직 기억한다...     


내가 아주 작을 때 나보다 더 작던 내 친구

내 두 손 위에서 노랠 부르며

작은 방을 가득 채웠지.

품에 안으면 따뜻한 그 느낌

작은 심장이 두근두근 느껴졌었어.     


우리 함께 한 날은 그리 길게 가진 못했지.

어느 밤 얄리는 많이 아파 힘없이 누워만 있었지.     

슬픈 눈으로 날갯짓하더니

새벽 무렵엔 차디차게 식어 있었네.     


굿바이 얄리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까.

굿바이 얄리 너의 조그만 무덤가엔

올해도 꽃은 피는지.     


눈물이 마를 무렵 희미하게 알 수 있었지.

나 역시 세상에 머무르는 것.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할 말을 알 순 없었지만

어린 나에게 죽음을 가르쳐 주었네.     


굿바이 얄리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까.

굿바이 얄리 너의 조그만 무덤가엔

올해도 꽃은 피는지.     


굿바이 얄리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까.

굿바이 얄리 언젠가 다음 세상에도

내 친구로 태어나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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