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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Apr 09. 2021

보라색 우산, 바나나 우유

  10년 전 여름, 중국에서 한 시민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인터넷으로 널리 알려진 이 풍경. 마음 깊이 곱게 접혀 있다가, 가끔씩 펼쳐지고는 한다.

     

  「여름 어느 날, 중국 장쑤(江蘇) 성 쑤저우(蘇州)의 한 거리. 갑자기 억수 같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때, 도로 한가운데 있던 한 나이 든 장애인 걸인이 미처 그 비를 피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빗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바퀴 달린 작은 나무판 위에 앉아서 어떻게든 비를 피해보려 애써보지만 그가 의지할 곳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보랏빛 우산을 든 한 소녀가 세찬 빗줄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소녀는 나무판 위에 쪼그려 앉아서 느릿느릿 바퀴를 굴리는 거지 할아버지에게 우산을 씌워준 채 계속 따라갔다. 소녀의 우산은 점점 할아버지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고, 할아버지가 비를 맞지 않도록 갖은 애를 쓰는 사이, 그녀의 옷은 온통 젖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소녀는 할아버지가 비를 피하는 곳까지 묵묵히 우산을 받쳐 들고서 따라갔다.」 (출처: 2011. 8. 25. 조선일보)     


  한여름의 소나기든 한겨울의 칼바람이든, 힘들고 외로운 눈물 속에 잠긴 이들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그래서인지 겨울이면 특히 더 자주, 더 많은 이들이 ‘나눔’을 이야기하고 실천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나눔은 곧 물질적인 기부와 동의어다. ‘불우이웃 돕기’라고 하면, 우선 구세군 자선냄비가 떠오른다. 지금은 드물어졌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연말 TV 뉴스 마칠 무렵 미처 다 읽기도 전에 휙 휙 스쳐 지나버리는 수많은 기업체와 유명 인사들의 금일봉 액수 자막들은 흔했다. 지금도 연말연시 불우이웃 돕기의 단골 아이템은 쌀과 연탄.     


  본질적으로 인간도 동물이기에, 심장박동과 호흡이 생존의 제1조건이다. 그래서 먹거리와 땔거리가 겨울을 건너가기 위한 필요 최소한의 요건임은 당연하다. 헌법이 선언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도 물질적 기본여건을 토대로 생존의 보장이 있고 나서야 가능한 것. 그러하기에, 춥고 배고픈 그늘에서 힘겹게 하루를 버티는 어려운 이들에게 베풀어지는 쌀과 연탄의 행렬은 참 귀한 고마움이다. 때문에 1년 중 단 한 철이지만 겨울이라는 차가운 계절이 있기에 사회 각계의 따뜻한 온정이 모여들게 되는 조금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감히 냉소하거나 폄하할 수는 없다.     


  다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쌀가마니 트럭과 연탄 리어카가 일으키는 흙먼지에 가려져서는 안 된다. 바로 ‘마음’.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온 영혼으로 함께 느끼고 쓰다듬는 진실한 마음이 먼저여야 한다. ‘마음’이 결여된 라면박스나 금일봉투는 그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억지 적선일 뿐이다. (절대로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연말연시 자선과 기부는 일부 특권층이나 부유층의 경력관리용 억지 춘향이 이벤트로 보일 때도 있다. 배고픔과 추위에 대한 잠깐의 공감이나 연민도 없이, 그저 생색내기로써 ‘자선가’라는 액세서리를 가슴에 달기 위함이 숨은 의도라면, 그런 이벤트는 힘든 이들에겐 오히려 모욕에 가깝다.     


  그러하기에, 매년 언론 한 귀퉁이를 작지만 아름답게 차지하는 ‘익명의 기부천사’ 소식은, 그래도 ‘아직은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다.’는 위안과 희망을 준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는지 감추는지 여부가 나눔 안에 배인 진실성의 가늠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오로지 과시와 홍보만을 위한 일과성 자선 이벤트를 즐기는 ‘철새 자선가’들보다는 ‘이름 없는 천사’들이 우리 사회에 더 많았으면 한다.     


  폭우 속에서 걸인 할아버지와 말없이 함께 걸었던 그 소녀의 보라색 우산이 이 세상에 좀 더 많아지기를, 그 우산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소녀의 진심 어린 공감과 따스한 눈빛이 보다 더 많은 이들의 눈동자에 깃들고 퍼져가기를 소망한다. 그러면서, 십수 년 전 직접 마주쳤던 또 다른 풍경이 마음속에 살짝 펼쳐진다.


  「겨울의 길목인 11월 중순 어느 저녁. 키보다 세배는 높을 폐지 리어카를 끌던 허름한 행색의 할머니는 많이도 지치셨던지 리어카를 잠시 세우고 편의점 입구 계단에 걸터앉아 계셨다. 시장하셨나 보다. 폐지 더미 사이 구겨져 있던 검은 비닐봉지를 열고는 빵 하나를 꺼내어 고단한 육신을 달래는 할머니. 바로 그때 그 앞을 지나던 한 여학생이 잠깐 편의점에 들러 나오더니 할머니에게 다가가서는 뭔가를 손에 쥐어 드리고는, 다시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대체 뭐지?’ 궁금한 마음에 할머니 가까이 다가서자 눈에 들어온 것은 바나나 우유 한 개.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눈시울도 따뜻해진다. 그 학생, 할머니한테 무어라 한마디 한 것 같던데... 무슨 얘기였을까. “할머니 목메시겠어요. 같이 천천히 드세요.”라고 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어쩌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지도. 말이 필요 없었겠지. 마음 그 자체,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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