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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Jul 04. 2021

브런치 140일. 부끄러움만 늘었다.

두서없이 적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다소 읽기 거북한 대목도 있을 수 있습니다.


0.

  소수(素數)를 좋아한다. 꽉 찬 느낌이 든다. (1은 당연한 것이니 제외해도 상관없다) 1과 자기 자신 이외로는 그 어떤 수로도 쪼개어지지 않는 단단함. 스스로가 아닌 그 무엇에도 토막나지 않는 고집을 넘어선 순수함. 2, 3, 5, 7... 한 자리 소수(素數) 다음으로 등장하는 두 자리 첫 소수는 11이다. 그래서 억지로 괜한 의미부여를 해본다. 11 곱하기 11. 121번째라는 대수롭지 않은 순서의 대수롭지 않은 글이다.

2357을 떠올리는 23:57


1.

  월급을 받는 대가로 팔 수밖에 없는 내 시간(바꿔 말하자면 목숨)의 60% 정도는 대필(代筆)에 할애된다. 이름 있는 분들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다양한 형태의 글들을 대신 작성한지도 5년이 되어간다. 그 이전에는 글이라는 것을 써 본 적이 없다.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사계절이 다섯 바퀴를 도는 동안, 밥값을 하기 위해 남의 글을 대신 써왔다. 물론 결코 불법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초안만을 작성할 뿐, 최종적인 원고는 글의 명의인이 다소의 첨삭을 거쳐 확정하는 것이기에... 대통령의 연설문도 초고를 작성하는 직원이 있다는 것과 조금 비슷한 경우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맹랑한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으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버르장머리 없는 욕심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주민등록증과 회사 조직도에는 물론 성명이 올라가 있으나... 나는 '유명인'이 아닌 '무명인'이다. 5년 동안 대신 썼던 글들이 나름 유력 언론 등을 통해 세상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 글들의 '엄연한 주인'들께서 '유명인'이기 때문이었다. '무명인'의 글에 공간을 허락해 주는 매체는 거의 없다. 기껏해야 보는 이가 아주 적은(없지는 않겠지만) 소규모 지역 매체들일뿐. 단 글 네댓 편만으로 브런치 메인에 떠올라서 순식간에 구독자 몇 천명을 끌어모을 수 있는 전 모 연예인도 아니고... 그렇다고서 등단 작가도, 출간 작가도 아니며 그럴싸한 경력도 '이름도 없는' 아주 사소한 개미 같은 인간은 감히... 자기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것... 부끄럽고 주눅 든다.


2.

  '브런치' 작가로 선정될 것이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흘끔흘끔 간혹, 괜히 보는 것조차 '감히 내가 읽을 자격이라도 될까?' 싶게 쪼그라든 마음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황송하게도 한 번에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2021년 2월 15일, '브런치' 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알림 메일을 열던 순간의 설렘과 기쁨은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때의 유치하고도 묘한 흥분은 여기에 남겨 두었다.

작가(作家), [작]지만... [가]능성


3.

  그전에 써두었던 글 몇 편과 새로이 쓴 몇 편을 모아서 나름의 첫 에세이집을 브런치 북으로 펼쳐낸 후, 매거진 세 개를 만들어 연재하고 있다.

  (1) [새벽별 아래서] 민법을 소재로 한 법 에세이, (2) [몽당연필] (직접 찍거나, 무료 이미지 사이트에서 얻어온) 사진을 곁들인... 감히 시(詩)라고는 할 수 없는 시시한 생각들을 담은 짧은 토막글들, (3) [몽당연필 2] 노래 제목과 멜로디, 가사를 통해 느낀... 역시나 시시한 생각들을 담은 짧은 토막글들


4.

  고백하건대... 감히 브런치 작가가 된 이후 140일 동안, 오늘까지 이 글까지, 모두 121편의 (글이라고 하기 부끄러운) 글 비슷한 시시한 것들을 발행해 오면서...

   부끄러움과 주제 파악만 늘어났다. 정말... 말 그대로 '글다운 글'을 쓰시는 진짜 '작가'님들이 셀 수도 없이 많다는 것만 새로이 알게 되었다. 작아지고 싶지 않아서 들어선 브런치 작가의 길 위에서 나는 더 더 작아지고 있었다.


5.

  안치환의 곡이다. 소금인형. 바다의 깊이를 알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소금인형... 지난 140일 간 소금인형... 슬픈 것은... 바다의 깊이를 채 알기도 한참 전에 소금인형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


6.

  절필(絶筆)의 유혹을 코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다. 그 뜻을 분해해 보니 그렇게 되더라. 애초에 내게는 끊을 붓이라는 것이 없었다. 유치한 아마추어 작가가 대체 뭘 부러뜨린다는 건가? 데뷔조차 못한 배우는 그래서 좋다. 영원히 은퇴할 일이 없으니.


  그래서... 계속 쓰기로 한다. 글이 아닌... 글 비슷한 그 무엇인가를 여전히 끄적이기로 한다.


7.

  브런치 140일 동안의 지극히 개인적인 소소한 느낌을 덧붙인다.


  가. 여기는 철저한 비영리 공간. 보험을 파는 곳도 아니고, 구독자 머릿수와 조회 수에 따라 돈이 붙는 유튜브도 아니다. 지인 영업 절대 하지 않기를 권한다. 얼굴 보고, 평소 친분 보고 구독해 주는 지인들, 90%는 읽지도 않는다. 구독을 누른 후 며칠 안에 대다수 지인들은 브런치 앱 새 글 알림을 mute 시킨다고 보면 된다. 글이라는 것은... (가면 갈수록) 소수의 취향이자 취미가 되어가고 있다. 글을 읽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고서 흔쾌히 '구독' 탭을 눌러주셨던 지인들을 원망하지는 말아야 할 것. 다만 브런치 작가로 선정된 흥분과 기쁨에 굳이 지인들에게 동네방네 알리지는 않는 것이 좋을 듯.


  나. 많은 분들이 하시는 말씀은 결국 맞는 말. 구독자 수, 조회 수, 라이킷 수... 연연하지 않기를... 당신이 쓴 글의 가치가 그에 비례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 "내 글을 세상에서 제일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구독하는 사람도, 내 글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도, 내 글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바로 작가 본인"


  다. 쓴다는 것은... 1차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다. 인류의 최후 1인이 지구에 혼자 남게 된다 해도... 그는 공책과 연필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계속 무엇인가를 쓸 것이다. 남의눈을 의식할 이유가 없다.


  라. 누구나... 그저 한 조각이다. 이 세상이라는 퍼즐의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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