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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Jul 14. 2021

인어의 마지막 노래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응모작 - 인어공주

막내가 공기 속으로 흩어진지도 석 달이 지났다. 이제는 바다 왕성도 깊게 빠져있던 슬픔의 나락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조심스럽게나마 조금씩, 바다 왕성의 모두는 충격에서 헤어나 그 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채비를 차리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셋째는 아직도 잘 먹지 못하였으며, 여전히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공기의 딸이 되어버린 막내를 가장 아끼던 셋째의 추억 바구니에는 온통 막내와의 즐거운 시절들뿐이었다. 다시는 영영 볼 수 없다는 기가 막힌 충격, 하루가 갈수록 잦아들기는커녕 곱절로 커지는 슬픔. 그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슬픔은 늪이었다. 내딛으면 딛을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수렁으로 잠겨 들면서, 차츰 셋째의 슬픔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익어갔다. 복수할 거야. 갈가리 찢어버릴 거야.


셋째가 그토록 힘겨워하는 동안... 하루 온종일을 왕자 곁에 붙어서 그의 평안과 즐거움을 보이지 않게 돕는, 이제 공기의 딸이 된 막내는 나날이 즐겁고 감사했다. 왕자님이 내 여기 있음을 모르면 뭐 어떤가. 시간이 흐르면서 왕자는, 물거품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여기 공기 속을 헤엄치는 막내 인어공주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갈 테지만... 그래도 막내는 행복했다. 아무것도 영영 받을 수 없는 사랑. 내 사랑하는 이가 이 내 사랑을 끝끝내 알지 못할 이 외사랑. 그래도 막내는 그저 감사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다만 지금 그대로 건강하게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울지도 말고 내 눈앞에 그대로만 있어 주어요.


가끔씩, 아주 가끔씩 바다 왕성과 가족들에 대한 향수에 젖을 때면, 막내는 궁전을 나와 바다 위를 달리곤 했다. 공기의 딸은 바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보고픈 아빠와 할머니와 언니들의 얼굴들. 그저 파도가 바위에 물보라 튀길 때, 흩뿌려지는 바닷물 방울로 그려볼 뿐이었다. 그 시각. 막내를 그리워하다 울다 지친 셋째는 바다 왕성을 나섰다.


빠져 죽은 인간의 뼈다귀로 지은 마녀의 집은 그대로였다. 두꺼비들과 물뱀들과 노니는 마녀의 모습도 변하지 않았다. 해골로 수놓은 마녀의 집 문을 들어서는 셋째가 채 문을 닫기도 전에 마녀는 말을 시작했다. “다 알고 있어. 네가 뭘 원하는지. 방법은 네 막냇동생 때와 똑같아. 목소리를 내놓으렴. 그럼 넌 다리를 갖게 되고 인간이 될 수 있지. 하지만, 단 하루 안에 네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넌 물거품이 될 거야. 어쨌든 넌 다시는 인어로 돌아올 수 없어. 왕자를 죽이고 인간으로 도망치며 살거나, 물거품이 되거나.” 대답 대신 셋째는 입을 열고 혀를 내밀었다.


“잠깐!” 약병을 받아 들고 나서려는 셋째를, 잠시 망설이던 마녀가 불러 세웠다. “... 이 칼을 쓰도록 해. 이 칼로 왕자의 심장을 찌르면, 넌 다시 인어가 될 수 있어...  머리칼은 받지 않겠어.” 칼을 받아 물끄러미 바라보던 셋째는 마녀의 집을 나와 수면을 향해 곧바로 헤엄쳐 올랐다.


궁전 안뜰 화단. 꽃과 나무들 사이 새소리는 그 안을 잠시라도 걷는 모든 이에게 천국을 살짝 거니는 듯 황홀경을 선물하고도 넉넉히 남는 정도였다. 다정하게 손잡은 왕자와 신부는 걷다가 서로를 마주 보기 위해 멈추다, 다시 걷다가 멈춰 서로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봄의 정취 속에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하고 담담한 풍경. 혹여 그들의 한낮 데이트에 방해될까 봐 공기의 딸, 막내 인어공주는 두어 발짝 뒤에서 조용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때 꽃밭의 꿀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제 식탁을 떠나 나뭇잎 그늘에 앉으려 팔랑거리는 흰나비를 잡겠다고 손을 뻗은 신부가 그만 휘청. 더 놀란 왕자가 그녀를 부축하다 더 휘청. 화들짝 제일 놀란 건 공기의 딸. 순간 왼 주문의 힘, 공기의 마법으로 둘을 넘어지지 않게 붙들고서 막내 인어공주는 휴...


화단을 지나 연못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 이르는 궁전 밖을 향하는 대문에는 경비병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바닷가에 가시려는 겁니까?” 경비대장이 물었다. “그래요. 오늘은 우리 둘이서 좀 걷고 싶으니, 따라오지 말아요. 나도 칼을 차고 있으니 염려 말고.” 궁전을 나와 마을 모퉁이를 꺾어 돌면 바닷가로 곧장 향하는 좁고 굽은 골목길이 펼쳐졌다. 손잡고 걷는 왕자와 신부. 두 사람 뒤를 소리 없이 따라가는 것은, 공기의 딸. 그리고 그의 셋째 언니였다. ‘앗! 언니!’ 막내 인어공주가 뒤늦게야 셋째 언니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그녀의 손에 쥔 마녀의 칼이 번뜩이며 왕자의 등을 향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망설일 틈도 없었다. 아무도 듣지 못할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막내는 바람의 주문, 공기의 마법으로 마녀의 칼을 옆으로 쳐냈다. 그와 동시에 돌아서며 칼을 뽑은 왕자는 바로 눈앞에 쓰러진 셋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괜찮아요?” 왕자는 이 갑작스러운 칼과 자객의 등장에 놀란 신부부터 살폈다. 왕자를 올려 노려보는 셋째의 눈은 마녀의 칼보다도 날카로웠다. “내 동생이 너 때문에 죽었어. 너를 사랑한 죄 아닌 죄로 내 동생이 죽었으니, 너도 죽어야 해!”라고 외쳐보지만,


다리를 얻기 위해 마녀에게 목소리를 넘겨준 셋째의 피맺힌 절규를 들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단 한 사람. 막내만이 소리 없는 그 외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된 막내 인어공주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마녀의 칼. 왕자님이 저 칼에 쓰러져야만 언니가 바다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면 언니는 물거품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왕자님... 언니... 아... 바로 그때,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저 위에서 지켜보던, 공기의 딸들을 이끌고 관장하는 정령이 막내 앞으로 내려 나타났다.


“정령님!” “이렇게 운명과 인연이 흐트러져 얽혀버린 이상, 누군가 하나의 영혼은 영원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왕자가 죽거나, 네 언니가 물거품이 되거나. 여기에 네게 선택의 기회를 하나 주겠다. 왕자도 네 언니도 살 수 있으려면, 네 영혼의 소멸이 필요하다.” 막내 인어공주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고맙습니다. 정령님. 고맙습니다. 부디 제 영혼을 거두시고 저 두 사람을 살려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정령님.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노래를 부르게 해 주세요.”


그토록 왕자에게 들려주고 팠던 자신의 목소리. 단 한 번도 왕자가 듣지 못했던 바다와 하늘의 소리가 바닷가에 울려 퍼졌다. 정령도, 왕자도, 셋째도, 신부도 모두 숨소리를 죽이고 인어공주의 마지막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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