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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Jul 13. 2021

고운 할머니 백조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응모작 - 미운 아기 오리

무릇 살아있던 모든 것들의 마지막은 쓸쓸하고 초라하다고들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여기 삶의 끝에 다가서는 백조가 그러하다. 가쁜 숨을 힘겹게 내쉬는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초롱초롱 영롱하였고, 부리 언저리에 머문 미소는 변함없이 상냥하였다. 가족들이 빙 둘러선 침대의 하얀 시트보다도 더 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깃털들은 하나하나 기품을 잃지 않은 채, 창문 커튼을 간지럽히며 불어 드는 바람결을 다정히 어루만졌다.


“할머니! 아파? 왜 누워만 있는 거야? 할머니 미워! 요샌 나랑 호수에서 놀아주지도 않고!” 평소보다 더 튀어나온 부리로 볼멘 투정을 삐약대는 막내 아기 백조를 바라보는 할머니 백조의 눈가는 이내 그윽하게 젖어갔다. “아가.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밥 잘 먹어야 해. 자기 전에는 꼭 치카치카해야 한다. 사랑한다. 아가야...” 아들, 딸, 손주들의 흐느낌 속으로 그네들이 흘리는 눈물이 잠겨 들며, 늙은 백조의 눈도 서서히 잠겨 들어갔다. “안녕! 이 세상아. 너를 만나 걸어온 그 나날들 모두, 참 고맙고 아름다웠다. 내 만났던 모두들아. 사랑했고, 사랑한다. 계속 잊지 않고 사랑할게...” 백조의 마음속 마지막 혼잣말 메아리가 잦아들 무렵, 할머니의 가쁜 숨도 고요와 평화의 해안에서 이내... 멈췄다. 그리고...


여기가 어디지? 죽음 건너편 다음 세상인가? 잠시 할머니 백조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숨을 거둔 창가 침대가 아니었다. 노을에 물든 호수, 초저녁 바람에 일렁이는 잔물결 위에 떠 있는 그녀의 몸에 생기가 돌며 날갯죽지에 살며시 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그녀의 몸과 정신이 또렷해지고 있음을 백조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서산 너머로 잦아들어야 마땅할 태양이 거꾸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이내 깨달았다. 엷어지는 노을을 딛고, 서쪽 하늘 구름을 아래로 밀어내며 해가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지만 백조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다시 깨어난 그녀가 올라탄 세월의 파도는 거꾸로 향하고 있었다. 역시나 아주 느리게 할머니 백조의 머리 위 숨구멍으로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감싼 순백색 깃털의 광채와 윤기도 젊음을 차려입기 시작했다. 시간의 뒷걸음질 속에서 차츰 백조는 할머니로부터 젊은이, 그리고 아이로의 길을 향해 앞으로 내딛고 있었다. 이 느닷없는 역주행 환생 속 당황과 혼란도 잠시, 백조의 눈은 반짝 빛났다. 그녀 앞에 다시 던져진 두 번째 삶에서 어디로 가고 싶은지가 생각났던 것이다. 짧았던 삶 속에서 짧지 않은 기억으로 새겨진 그 아픔의 시간과 공간, 그때 그 순간에는 단 1초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던 서러움의 좌표를 향하는 백조의 심장은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설렘으로 마구 두근거렸다.


[하나]

백조 아저씨와 아줌마들의 우아한 자태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만났던, 싱그러운 봄날 그 시냇가. 그 옛날 자신을 그대로 닮은 어린 백조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웅크려 있었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아이의 눈물은 체념과 절망이 부르짖는, 차마 소리 내지도 못하는 마지막 유언임을 백조는 너무도 잘 알았다. “나를 죽여요!” 다가오는 백조를 향한 아이의 힘없는 목소리. 아! 나였구나... 나로구나... 백조는 행여 아이가 더 놀랄까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리고는 어린 백조의 날개를 살포시 어루만지며 물가로 이끌었다. “그렇게 서럽게 울면 목이 마르단다. 나도 그랬거든. 우리 같이 물 마실까?” 아이는 물속을 향해 기다란 목을 숙였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한동안 물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던 아이의 눈에는 아까와는 다른 색깔의 눈물이 흘렀다. “그래. 바로 너란다. 이렇게도 고운 네가 되려고, 그렇게도 네가 외롭고 힘들었던 거란다. 그리고 얘야. 앞으로 살면서 또다시 네가 서럽게 아플 날이 올지도 몰라. 하지만 절대로, 또 절대로 죽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거라. 세상은 항상 겨울이 아니란다. 네가 이겨낸 겨울의 끝에 지금 봄이 열린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 항상 견디고 기다리려무나. 자. 이제 날개를 펼치고 세상 속으로 날아오르렴.”


[둘]

꼬부랑 할머니와 그 할머니처럼 등을 제 맘대로 말아 구부리는 재주를 뽐내는 고양이, 그리고 알을 잘 낳는 짧은 다리 암탉이 모여 살던 허름하고 작은 집. 다행히 아직 무너지지 않고 세월을 버티는 그 통나무집 문을 열자, 익숙한 시골 집안 풍경과 잊을 수 없는 세 얼굴이 그녀를 똥그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 머뭇거림과 찬찬한 살펴봄 끝, 세 얼굴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아니. 넌! 그때 그...?” 그렇게나 자신을 구박하고 괴롭히던 그 셋은 어쩔 줄 몰라하며 어색한 반가움으로 젊은 백조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백조의 빛나는 날개를 넋 놓고 바라보는 할머니의 등은 더 꼬부라져 있었고, 세상 제일 잘난 척 기세 등등하던 고양이는 늙고 병들어 이제는 더 이상 재주를 부릴 수 없었다. 역시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여 이제는 알을 낳지 못하는 암탉의 눈곱 낀 두 눈에는, 주인 할머니가 언제 잡아먹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통나무집 문을 열며 백조는 살짝 망설였었다. 그러나 “이 셋을 어떻게 혼내줄까?” 싶었던 퉁명스러운 복수심은, 쓸쓸하고 초라하게 시들어버린 그들의 모습을 본 순간에 봄 햇살 맞은 눈처럼 녹아버렸다. 가만가만히, 그 옛날 통나무집을 쫓겨나듯 떠난 이후의 나날들을 나직이 들려주는 우아한 백조의 이야기를 듣던 세 심술꾼들의 눈가에도 봄 햇살 세례 받은 눈이 녹고 있었다. 백조는 날개를 뻗어 할머니와 고양이와 암탉의 눈물을 다정스레 닦아냈다. “당신들이 사무치도록 미웠던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랍니다. 당신들과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이 깃털들을 자라게 한 거지요. 햇볕만 비추는 땅은 사막. 비바람도 불어야지만 땅 위의 것들이 풍성할 수 있듯이... 내 지난 삶을 단단하고 담담하게 해 준 당신들에게 이제 나는 고맙습니다. 차 잘 마셨어요. 부디 건강하기를...” 통나무집 문을 닫고 나오며, 백조는 가지고 있던 몇 푼 은화를 문가에 살짝 내려놓았다.


[셋]

한여름의 푸른 초원 위로 아름다운 그림자를 그리며 날아가는 백조는, 조금씩 어려지며 다시 소멸을 향하고 있었다. 더는 날개가 바람을 감당하기 어렵게 될 즈음, 이제 아기가 된 백조는 시골길에 내려 기억 저 끝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엄마 오리와 오리 형제들의 거친 말과 그보다 더 따가운 쪼아댐은 여전했다. 하지만 아기 백조는 이제 더 이상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용서는 꼭 말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두 번째 겪는 거꾸로 삶의 여정 끝 언저리에서 그녀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다시 살아본 백조 삶의 마지막 밤.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은 건초더미 위 엄마 오리 곁에 옹기종기 올망졸망 붙어서 삶의 첫 밤 단잠을 청하는 귀여운... “형제들아.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 내일이면 너희와 나, 각자 삶과 죽음을 향해 반대로 엇갈리게 될 길이 이렇게 마주치는 오늘 밤. 나 아픔과 서운함은 다 버리고 아직 철없는 너희의 귀여움만 마음에 담아 갈게. 너희 앞에 펼쳐질 빛나는 날들을 응원해!” 한여름이지만 밤공기는 서늘했다. 혹여 잠 깰까 봐 조심조심 조용조용 아기 백조는 건초를 입에 물어다 아기 오리들의 배를 살포시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두 번째 삶의 마지막 꿈을 향해 날개를 활짝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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