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inon Jul 15. 2021

종이학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응모작 - 눈의 여왕

1. 편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라. 우리 들판에서 함께 잠자리를 잡던 그 여름의 냄새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폭포처럼 쏟아지던 소나기 속, 우산은 하나.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이느라 옷이 다 젖은 네게서 나던 빗물 섞인 땀 내음이 난 향기로웠어. 넌 물수제비를 참 잘 떴어. 시냇가 예쁘게 납작한 돌멩이를 찾는 것은 내 몫. 물 찬 제비처럼 물 위를 탁탁 튀어 달려가는 돌멩이에 내가 탄성을 내지를 때, 돌아서 으쓱하며 씩 웃던, 햇빛 젖은 풀잎 같던 너의 환한 미소.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 이토록 아프게 소중한 우리 어릴 적이 지금도 나는 선명하게 떠올라.


하지만 여름은 경쾌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영영 식지 않을 것만 같은 한낮의 태양도 먹구름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산 하나로 거센 빗줄기를 다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 먹구름이 못내 야속하도록 아주 오래오래 우리 머리 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아름답던 미소가 네 얼굴에서 사라지던 그날에는 난 미처 짐작하지 못했어.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초점을 잃어버린 네 눈에서는 눈물도 흐르지 않았었지. 너무도 허망하고 갑작스럽게 부모님을 여읜 네가, 가만히 네 어깨에 얹은 내 손을 뿌리칠 때만 하더라도, 난 미처 짐작조차 못했어. 그날 네 눈망울 속 따뜻함이 차갑게 식어버리면서, 늘 네 입가를 떠나지 않던 상냥한 미소가 시들어버리면서, 네가... 이토록 길고도 굳게 마음의 문을 닫아걸어 잠글 거라고는, 나... 짐작하지 못했어.


네가 나를 외면하는 것은, 나 견딜 수 있었어. 기다릴 수 있었어. 그래도 어느 날엔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올 거라며 나 참을 수 있었어. 그래도 어느 날, 가로등 불빛까지 덮어버리는 세찬 소나기 맞으며 골목길에 서 있는 내 등 뒤에서 탁, 우산을 펼치며 가만히 내 어깨를 다시 감싸 안는 네 모습을 그리며, 나 견딜 수 있었어. 외로움은 참을 수 있었어. 하지만,


세상 다신 없을 네 착한 마음이, 풀벌레 한 마리 죽음에도 눈물 흘리던 네 고운 마음이 믿어지지 않게 사나워지는 것. 난 너무 힘들었단다. 술과 담배 정도는 그럴 수 있다고 애써 이해하려 했었지. 사춘기의 자잘한 방황과 일탈, 누구나 겪게 되는 소소한 탈선에서 그칠 거라 생각했었어. 그런데... 납작하고 예쁜 돌멩이로 시냇가 물수제비만 뜨던 네 부드러운 손이 거칠고 딱딱하고 흉측한 돌멩이 주먹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나, 마음 찢어지더라. 그렇게나 둘도 없이 친하던 친구의 돈을 뺏고, 이틀이 멀다 하게 싸움질에 몰두하는 네 얼굴은 더 이상 내가 알던 어린 나날의 네가 아니더라. 너무나 미웠단다. 나는 네가 너무나, 너무나 밉고 또 미웠단다.


그렇게나 미웠는데, 그래도 나는 널 미워할 수가 없었어. 왜 그랬는지, 왜 지금도 너를 미워하지 못하는지를 난 모르겠어. 밤의 대장에게 네가 충성을 맹세한 그날, 네 팔뚝에 징그러운 용 문신이 새겨지던 그날, 소름 끼치게 차가운 검은색 승용차에 오르며 어깨들의 직각 인사를 받는 너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그날 이후로, 너는 내게서 달나라보다도 더 멀어지고 말았지. 전화도 받지 않는 너.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빌딩 제일 높은 층 밤의 대장 옆방에 있다는 널 만나러 가면 소름 끼치게 차가운 검은 양복 어깨들이 가로막았지. 수소문 끝에 용기 내어 네가 사는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을 때, 속옷만 걸친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와 퉁명스럽게 “오빠 샤워 중이에요. 하실 말씀 있으면 저한테 하세요.” 송곳 같은 비웃음을 내게 던졌을 때도, 나는 네가 죽도록 미웠는데, 그렇게 비참했던 마음 한구석에서 살짝 피어나려 하던 미움은 금세 사라지고 말더라.


하지만 밤의 대장 오른팔이 되어 범죄의 도구로 전락한 너를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어. 네가 벗어나고 싶다 해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도 알았어. 무슨 용기였을까. 그래서 찾아갔어. 빌딩 지하 주차장에서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만난 밤의 대장 앞, 무릎 꿇고 너를 놓아달라고 고개 숙인 내 코 앞 그의 구두코는 소름 끼치게 차갑고 번쩍거리더라. 그날 내 옷에 그려진 학 무늬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말했어. “종이학 잘 접어?” “네?” “백만 마리를 접어와. 네 그 애틋한 사랑이 과연 그 정도라면, 그럼 생각해 보지.”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잠을 자지 않고 접어도 1년에 접을 수 있는 건 5만 마리더라. 10만 마리를 채웠을 때, 난 밤의 대장 차에 그 종이학들을 뿌려 덮어놓고 펑펑 울었어.


종이학 하나를 접을 때마다 드렸던 10만 번의 간절한 기도가 통한 것일까. 너는 어둠 속에서 비로소 탈출하게 되었지. 하지만, 너와 나 몇 년 만에 저녁 함께 하고 헤어진 그날. 그 늦은 밤. 깜빡 식당에 두고 온 전화기를 찾아서 내게 가져다주던 넌... 골목길 불 꺼진 건물 지하실로 나를 끌고 가 겁탈하려는 그놈 숨이 끊어진 후로도 주먹을 멈추지 않았고, 가까스로 범죄의 소굴을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렇게 철창 안에... 다시 너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 글이 교도소로 보내는 내 마지막 편지가 되겠구나. 출소일에 친 동그라미를 향하는 숫자 위에 X표를 그을 날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구나. 네가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 나오는 그날에는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아프고 시리던 지난날, 너와 나 너무도 힘들었던 그 시간들이 그래도 헛되지만은 않았다고 속삭이며 하늘을 어루만지며 눈이 내려왔으면 좋겠다. 어두웠던 어제를 덮고서 이제 다시 내딛는 새 발걸음을 반가이 맞아주는 하얀 카펫이 우리 앞길에 펼쳐졌으면 좋겠다.


2. 우산

철문이 열리고 그가 걸어 나온다. 그녀의 하얀 입김을 적시는 눈송이들을 가르며 그가 그녀에게 다가간다. 만난다. 마주 선다. 서로의 눈을 말없이 바라본다. 안는다. 그토록 길고 긴 시간 끝의 이 짧은 포옹이 영원이기를 소원하는 두 사람의 입술이 만난다. 그가 말한다. “이제 우산은 필요 없어. 내가 네 우산이 될 테니까.”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눈송이와 손잡고 대지를 함께 적신다. 눈송이는 더 진해지고, 세상은 더 하얗게 물들고 있다. 깍지 낀 둘의 왼손과 오른손이 점점 따뜻해지면서, 눈밭을 걷는 두 사람의 마음이 환하게 하나가 된다.

작가의 이전글 인어의 마지막 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