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월의 애벌레 – 제16화
11시가 좀 넘은 시각. 화면 아래 자막으로 한산시 선거 결과가 천천히 흘렀다. 시장 현병규 당선 확실. 시의원...... 장세연 당선 확실. 태연은 맥주캔을 찌그러뜨리며 TV를 껐다.
전국 동시지방선거의 끝은 본격적인 장마의 시작을 데려왔다.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지루하면서도 끈질기게 한산시를 덮은 먹구름은 제 슬픔의 분비물을 지상에 던져댔다. 습한 도시의 회색빛 표정 아래로 북적대는 일상의 조각들은 착실하게 시간의 등에 올라타서 각자의 어디론가로 향해갔다. 오래되어 딱딱한 오징어를 씹는 것 같은 공무원의 일과가 끝나면 태연은 복싱 체육관으로 차를 몰았다. 탁탁 퍽퍽 샌드백을 때리는 글러브의 리드미컬한 박자에 맞춰 스텝을 밟다 보면 순간에의 숨찬 몰입감이 주는 평온함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곤 했다. 장마의 절정, 그 꼭짓점을 친 7월 1일에는 거센 폭우 속에서 재선 현병규 시장의 취임식과 새로이 구성된 한산시의회 개원식이 열렸다. 사내 방송을 통해 의회 개원식이 중계되는 동안 유태연 주무관은 시의회 홈페이지를 열었다. 새정치당 초선, 한산시 역대 최연소 시의원 만 24세 장세연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태연은 고개를 돌려 사무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빗물과 함께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장맛비를 투둑 털어내는 구름 틈으로 젖은 햇살이 기웃거리는 7월 하순의 오전. 한산시청 3층 중회의실 문 앞. 평소 입지 않던 검은색 투피스 정장이 못내 갑갑하기만 한 안이지는 면접 순서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열었다. “딸. 오늘 면접이지? 떨지 말고! 잘 해낼 거라 믿어! 힘내렴!” 시큰둥한 손가락으로 메시지를 삭제하자 진행 요원이 외쳤다. “안이지 수험생! 들어오세요!”
문을 닫고 면접관들에게 공손히 목례를 한 이지는 자리에 앉으며 흠칫 놀랐다. 세 명의 면접관. 그중 맨 오른쪽에 앉은 한산시청 감사담당관 강혁찬 사무관은 이지보다 더 놀란 얼굴이었다. 1달 여 전의 밤. 바 <쁘렘>에서의 소동이 안이지와 강혁찬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되살아났다.
......
“야! 오늘 밤 형님 모셔라. 이 분이 누구신지 알기나 해? 응? 영광인 줄 알아~ 마담 불러! 내가 호텔비랑 2차 떡값 계산할 테니까!” 호텔... 떡값... 이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이제 들어가세요. 형님 모시고 끝내주는 하룻밤 떡 즐기는 영광은 당신 딸한테나 주시고!” “뭐? 이게 감히 어디서. 야! 이 미친년아! 다시 짖어봐. 이 개 같은 년아! 뭐 딸?? 니가 우리 수영이 알아?” 금붕어처럼 생긴 시청 감사담당관 강혁찬이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이지를 향해 잔에 든 술을 확 뿌렸다. 이지는 침착하고 담담하게 코냑 세례를 맞았다. 그리고는 잔을 들어 금붕어에게 똑같이 술을 확 뿌렸다.
......
금붕어의 눈알이 커지다 못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침착한 표정으로 이지는 면접관 강혁찬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틀에 박힌 면접 질문 몇 개에 대해 전혀 긴장하지 않고 유창하게 모범답안을 읊고 난 안이지는 면접장을 나서며 잔뜩 찌푸린 얼굴의 강혁찬 사무관에게 다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면접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안이지가 검은색 투피스와 흰색 블라우스를 벗어던지고 라면 냄비에 물을 받는 그때. 한산시청 인사팀장이 강혁찬 감사담당관의 방을 노크했다. “들어와!”
“담당관님. 아까 면접에서... 속기직 안이지. 점수를 아주 밑바닥으로 긁어놓으셨던데... 혹시 무슨 이유라도?” “면접 점수야 원래 면접관 재량대로 주는 거 아냐? 내 보기엔 영 아니던데 뭘!” 퉁명스러운 강혁찬의 대꾸에 인사팀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친구 필기 성적이 전 직렬 통합해서 제일 높습니다. 과목이 똑같은 행정직으로 응시했어도 수석 합격했을 점수인데. 그리고 다른 두 명 면접관도 제일 높은 점수를 주셨는데... 이렇게 낙제점을 주신 게... 저로서는 선뜻...” “아, 붙이던지 떨어뜨리던지 점수 합산해서 니가 알아서 해! 난 내가 준 점수 고칠 생각 없으니까! 나가봐!”
2주 뒤, 안이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최종 합격 축하드립니다. 9월 1일부터 출근하시면 되고요. 그날 아침 임용장 수여식이 있으니까 단정한 복장으로 8시까지 시청 대회의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다시 2주 뒤, 행정시스템 인사 동정 게시판을 연 유태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9월 1일 자 인사발령... 사회복지과 행정 8급 유태연, 의회사무과 근무를 명함... 임용장 수여식 : 9. 1. 08:30 대회의실’
태연이 인사발령 통지문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때, 박봉술 한산타임즈 편집국장이 시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현병규 시장이 툴툴거렸다. “거 노크 좀 하고 들어와라!” “좀 앉아봐! 의논할 게 있어.”
차 두 잔을 놓고 나가는 여비서 엉덩이를 음탕한 눈깔로 쳐다보던 박봉술이 입을 열었다. “인사는 잘 냈어. 딱 하나 빼고! 그 언론홍보팀장 새끼 좀 갈아치우라고 내가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 현병규 시장이 찻잔을 손에 쥐며 달래듯이 말했다. “12월 인사 때 날릴 거야. 지금 임기 초반이라서 그 자리가 할 게 많아. 좀 더 써먹고 치울 테니까 보채지 좀 마라. 그것 따지러 온 거야?” 박봉술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잠자는 주인 뒤통수를 물어뜯으려 한 개자식. 손 좀 볼 때가 됐다. 오늘 밤에 안명훈이 찜질 좀 하려구. 뒤탈 안 나게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