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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손님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15화

by rainon 김승진

수요일 해가 떠올랐다. 선거일이 밝았다.


새벽 4시. 요란스럽게 울려대는 전화기 알람 소리를 손끝으로 죽이면서 유태연은 새롭게 허락받은 삶의 또 하루를 맞았다. 오늘 출근 시간은 5시. 어제 오래간만에 체육관에서 운동을 한 탓에 피곤한 몸을 찬물 샤워로 깨우고서 태연은 운전석에 올랐다.


투표소에 도착했을 때는 먼저 도착한 직원들이 6시부터 밀려들어올 유권자들을 맞을 채비에 한창이었다. 평직원들이 맡는 투표소 업무는 크게 4가지. 투표객 안내, 명부 대조 확인, 투표용지 배부, 그리고 손발은 편한 대신 그만큼의 무료함과 졸음을 견뎌야만 하는 투표함 관리 담당에 당첨된 태연은 투표함 앞 철제의자에 털썩 앉았다. 손에는, 오후에 엄청 쏟아질 졸음을 희석시킬 싸구려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 오늘 하루 몇 잔을 마셔야 하나...


대규모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 위치한 덕분에 한산2동 제3투표소인 초등학교 강당 밖으로는 길게 이어진 유권자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고맙게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투표객들의 손이 투표함 속으로 투표용지를 밀어 넣는 모습의 무한반복을 멍하니 구경하던 태연은 문득 ‘투표객’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분해해 보았다.


투표객... 투표소를 찾는 ‘손님’... 그래 틀린 표현은 아니다. 잠깐 들렀다 투표소를 떠나는 유권자들을 그런 이유로 ‘손님’이라 칭하는 것이라면 용례에 맞는 적당한 단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국 유권자들은 몇 년 만의 이 직접민주주의 이벤트에서조차 주(主)가 아닌 객(客)의 위치라는 것을 더욱 기정사실로 고착시키는 언어의 사슬이지 않겠나... “단지 투표할 때만 자유로운 주인이고 선거가 끝나자마자 다시 시민은 노예로 돌아간다.”며 간접민주주의 선거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게 루소 맞지? 그나마 선거 때만이라도 시민이 주인임을 전제한 그의 일갈마저 무색하게 하는 표현일 수도 있겠다... 정치의 주인과 손님은 진정 누구인가? 태연의 생각을 깨려는 듯 투표관리관인 농업정책팀장이 어깨를 툭 쳤다. “가서 점심 먹고 와. 내가 잠깐 앉아 있을 테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시원찮은 에어컨 바람 틈으로 바깥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드는 6월의 폭염은 그러잖아도 가득 차서 둔해진 태연의 위장을 더욱 늘어지게 만들었다. 식곤증에 취한 태연은 감겨드는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입술을 안으로 깨물었다. 그때 강당 입구가 소란스럽더니 투표관리관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누구지? 고개를 돌리던 태연도 잠이 달아났다. 현병규 시장과 같은 당 도의원, 시의원 후보들이었다. 정치인들의 투표 이벤트를 촬영할 카메라들도 여럿 따라붙어 있었다. 태연도 철제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우리 직원들 정말 수고가 많아요들. 내 선거 마치면 전 직원 포상휴가라도 좀 지시해야겠네.”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서 현병규는 투표소 근무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눈을 마주쳤다. 그 뒤로...


환하고 세련된 표정을 얼굴에 차려입은 새정치당 시의원 후보 장세연도 직원들에게 미소를 날리고 있었다. 시장에게도 후보들에게도 투표소의 모든 직원들은 허리를 깊이 굽히며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정치인과 시민들 중에서 누가 주인이고 손님이냐에 대한 답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인과 공무원들 중에서 누가 주인인지 손님인지, 아니 주인인지 종인지는 답이 뻔한 거로구나 태연은 새삼 깨달았다.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을까 말까 하는 포즈를 취한 장세연을 향해 카메라 플래시가 연신 터졌다. “와. 우리 장 후보. 오늘따라 피부가 더 좋아 보여! 선거운동하느라 그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박봉술 편집국장의 기름기 뚝뚝 떨어지는 능글맞은 목소리에 장세연이 화답했다. “국장님. 감사합니다. 예쁘게 찍어주세요!” 사진 촬영을 마친 장세연이 용지를 투표함에 밀어 넣으며 태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태연과 악수하며 장세연은, 바로 며칠 전 일요일 저녁 시가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크게 힘주어 태연의 손아귀를 쥐었다. 마치 손으로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아니면 뭔가를 가르치려는 듯이. 누가 주인인지를 가르치려는 듯이.


그날 밤. 하루 온종일을 투표소에서 일해 받은 일당으로 편의점에서 사들고 온 캔맥주를 홀짝이며 유태연은 소파에 앉아 개표방송을 지켜보고 있었다. 11시가 좀 넘은 시각. 화면 아래 자막으로 한산시 선거 결과가 천천히 흘렀다.


시장 현병규 당선 확실. 시의원...... 장세연 당선 확실.


태연은 맥주캔을 찌그러뜨리며 TV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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