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잠에서 깬 녹음파일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20화

by rainon 김승진

스머프... 개구쟁이 스머프에 나왔던 그 까만 옷 입은 못된 악당 이름이 뭐였더라... 음... 맞다! 가가멜! 근데 만화에서 가가멜은 안경을 안 썼던 것 같은데... 뿔테 안경을 쓴 가가멜이 이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우리신문 정재호 국장입니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병원 2층의 카페는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열었다. 빵과 샌드위치... 입원 환자 보호자들을 위해 간단한 브런치 메뉴도 함께 파는 카페는 아직 한산했다. 8월 하순의 아침 햇볕이 그득 고인 구석의 유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이지와 뿔테 안경 가가멜이 마주 앉았다. 우리신문 정재호 국장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수첩과 펜을 꺼내는 동안, 이지는 조용히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바 <쁘렘>에서 일한 2년 동안, 각양각색 손님들을 통해 귀동냥으로 들은 잡 정보 중에는 지역신문사 두 곳 얘기들도 있었다. 전국 단위 중앙지, 그 밑으로 도 단위 지방지, 그 아래로 시·군 단위 지역지들이 위치하고, 한산시를 취재 권역으로 하는 지역신문의 양대 라이벌이 바로 한산타임즈와 우리신문이라는 것은 안이지도 익히 알고 있었다. 대머리 뚱보 뱀놈 박봉술과 원수지간이라는 그 우리신문 정재호가 이 사람이구나. 그런데 왜 아침 댓바람부터 날 보자고 한 거지?


“먼저... 갑자기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되신 것을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경황이 없으실 텐데... 이렇게 뵙자고 해서 죄송하기도 하고... 저는 아버지 안명훈 씨를 돕기 위해서 따님을 뵙자고 한 겁니다. 실례지만... 성함이?” “안이지 라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 건가요? 왜 아빠가 저렇게 집단구타를 당한 거죠? 누가 그런 거죠?”


“얘기하자면 좀 긴데... 시간 괜찮으신가요? 피곤해 보이는데...” 대답 대신 이지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가가멜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괜찮으니까, 얘기나 해 봐.’라는 이지의 속마음을 읽어낸 듯 정재호 국장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안명훈 씨가 현병규 시장 한산고등학교 후배라는 건 아시죠? 현병규가 시장에 당선되기 전 사업을 할 때부터 안명훈 씨는 현병규 아래에서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4년 전 현병규가 시장 선거에 처음 출마했을 때 이후로 계속... 이번 선거까지 선거 사무장을 맡으면서 최측근으로 일해 왔었죠.” 잠시 말을 멈추고 커피 향을 음미하는 정재호의 얼굴을 보면서 이지는 생각했다. 정말이지 가가멜을 많이도 닮았어. 어쩜 저렇게 코가 만화처럼 클 수가 있지? 앞머리는 다 어디다 버린 거야? 아빠가 현병규 시장 밑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일했던 것은 대충 이지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안명훈 씨는 나름 현병규 시장에게 충성을 다했고... 열심히 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병규라는 인간의 인격이었지요. 이건 뭐... 노예나 몸종 부리듯이 안명훈 씨를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하고... 인간적으로 안명훈 씨도 속이 많이 상했을 겁니다.” 별 대답도 호응도 없이 잠자코 듣기만 하는 이지를 잠깐 바라보던 가가멜이 말을 이어갔다.


“현병규와 손철기 양강 구도로 선거가 흘러가면서... 한산시청 간부급 공무원들도 자연스레 줄 서기를 했겠지요. 뭐 다는 아니겠지만... 원래 선거라는 게 그렇죠. 그런데 현병규가 손철기 후보 편에 선 공무원들, 현병규 눈에는 가시와 같은 직원들의 명단을 작성한 겁니다. 뭐 흔히들 쓰는 표현으로... 살생부, 블랙리스트... 뭐 그런 거죠.” 병원 카페 치고는 커피 맛 괜찮은데? 이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문제의 그 블랙리스트가 한산시청 공무원 노조 간부 손에 들어간 겁니다. 당연히 시청이 발칵 뒤집혔죠. 그게 선거를 사흘 앞두고 터진 일입니다. 제가 그 문건을 입수해서 보도를 했는데... 그런데... 현병규 고교 동창이자 사십 년 지기인 한산타임즈 박봉술이 즉각 그 문건의 진위 여부와 출처가 불확실하다... 그래서 우리는 인정할 수 없다... 는 내용의 공무원 노조위원장 명의의 성명서를 기사화했습니다. 나름 공무원들 권익을 보호한다는 노조에서 문건을 부인해 버리는 바람에... 크게 터질 뻔했던 이 사건은 그냥 흐지부지 가라앉아 버린 거죠. 그렇게 위기를 모면한 현병규는 재선에 성공했구요.”


“바로 그 살생부 문건... 블랙리스트가 최초 노조 총무국장의 손에 들어간 경로가 바로... 안이지 씨 아버지 안명훈 씨입니다.”


잔 속 커피가 토해내는 김을 바라보던 이지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아빠가 보복을 당했다는...?” “노조 총무국장과 저는... 당연히 취재원인 안명훈을 보호하려 했지요. 그런데... 어떻게 알아낸 건지... 박봉술이 안명훈 씨가 빨대라는 것을 눈치채버린 것 같습니다.”


이지의 눈망울에 천천히 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정재호 국장은 놓치지 않았다. “안이지 씨 아버지에게 테러를 가한 놈들이 누군지, 그 배후가 박봉술인지는... 아직은 알 수가 없습니다. 박봉술은 젊었을 때 이 지역 조직 폭력배였고... 지금도 동네 건달들 상당수를 수하에 거느리고 있는 놈입니다. 그놈 짓이라는 강한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아직 증거는 없어요. 솔직히 한산경찰서에서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설지도 의문입니다. 지금 경찰서장을 비롯한 간부 상당수가 박봉술과 친분이 두텁거든요... 저는... 이 사건의 배후가 박봉술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조폭의 피가 아직도 그놈 몸뚱이에 흐르고 있어요. 박봉술은 반드시 대갚음을 하는 놈입니다. 겁도 없이... 깡패 동원해서 사람을 각목으로 집단구타... 하고도 남을 인간입니다.”


“제게 원하는 게 뭐죠?” 이지가 물었다. “아버지가 깨어나시면... 그래도 딸이니까... 안이지 씨한테는 뭔가 얘기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폭행사건에 관한 뭔가 중요한 단서나 정황을 듣게 되시면... 꼭 제게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기사로 박봉술을 후려칠 생각입니다.”


가가멜이 떠난 후, 이지는 다시 응급실로 돌아왔다. 침대 옆 간이의자에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은옥이 이지가 다가가자 고개를 들었다. “어서 집에 가서 좀 씻고, 뭐라도 좀 먹어. 한 숨 자다가 낮에 편할 때 와. 내가 있을게.” “고마워. 언니...”


응급실 문을 나서려는 이지의 발이 멈췄다. 대머리 뚱보 박봉술이 들어서고 있었다. 손에 홍삼음료 1박스를 든 박봉술도 이지를 보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바로 그때... 박봉술의 면상을 마주하고 보니 그제야, 까맣게 잊고 있던 6월 초, 공무원 시험을 마치고서 바 <쁘렘>에 백일 만에 출근했던 그 밤의 소동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지의 핸드폰 속에 녹음파일로 잠자고 있던 두어 달 전 박봉술의 취한 음성이 깨어나 귓가에 소환되었다.


“그러니깐 말야, 지금 분위기가 응? 현병규가 시장 재선이 될 가능성이 당초 예상보다 점점 높아진단 얘기지. 손철기 쪽에 일찌감치 줄 선 6급, 5급들이 떨고 있다는 거야. 근데 이미 늦었어. 현병규 그 독사 자식이 이미 블랙리스트를 손에 쥐고 있거든. 그거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 내 작품이야, 그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뿔테 안경을 쓴 가가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