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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의 눈물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21화

by rainon 김승진

응급실 문을 나서려는 이지의 발이 멈췄다. 대머리 뚱보 박봉술이 들어서고 있었다. 손에 홍삼음료 1박스를 든 박봉술도 이지를 보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바로 그때... 박봉술의 면상을 마주하고 보니 그제야, 까맣게 잊고 있던 6월 초, 공무원 시험을 마치고서 바 <쁘렘>에 백일 만에 출근했던 그 밤의 소동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지의 핸드폰 속에 녹음파일로 잠자고 있던 두어 달 전 박봉술의 취한 음성이 깨어나 귓가에 소환되었다.


“그러니깐 말야, 지금 분위기가 응? 현병규가 시장 재선이 될 가능성이 당초 예상보다 점점 높아진단 얘기지. 손철기 쪽에 일찌감치 줄 선 6급, 5급들이 떨고 있다는 거야. 근데 이미 늦었어. 현병규 그 독사 자식이 이미 블랙리스트를 손에 쥐고 있거든. 그거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 내 작품이야, 그거!”


바 <쁘렘>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석 달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 이지는 뭔가 사고를 칠 것 같아 보이는 손님이 들어오면 핸드폰의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기억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기록뿐. 게다가 술떡 속 앙꼬가 된 진상 취객들은 절대로 자신이 싸지른 언행을 기억도, 인정도 하지 않기 때문... 핸드폰의 녹취 기능은 지방 소도시 조그만 술집 바텐더가 스스로를 지킬 방패였다.


응급실 입구에서 박봉술과 눈이 마주친 그 짧은 1초 사이, 이지의 머릿속은 빛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상황 파악과 계산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준비를 순식간에 끝낸 이지가 박봉술을 향해 반갑게 웃었다. “어?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근데 여긴 어쩐 일로?”


눈에 보이도록 당황한 뱀 눈깔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이지는 알 수 있었다. “어... 어... 아 난... 여기 후배 문병 온 건데... 근데 아가씨는 여기... 왜?” “아... 저희 가게 사장님 아버지가 어젯밤에 갑자기 다치셔서... 여기 계시거든요.” “사장님?” “네. 저희 바 사장님이요.” “거기 사장 아버지가 누구신데?” “환자 이름이요? 안명훈? 이라던 것 같아요.” “...... !!! 아 그래? 나 명훈이 보러 온 거야.” “어? 그러세요? 이리로 오세요.”


다시 들어서는 이지 옆의 박봉술을 본 은옥도 눈이 커졌다. 은옥이 뭐라 말을 꺼내기 전에, 이지는 박봉술 편집국장보다 반걸음 앞서 나가면서 은옥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재빠르게 먼저 말을 꺼냈다. “언니. 아저씨 보러 오셨대. 이제 보니 이 분... 언니 아빠랑 아는 사이셨네.”


“아... 네... 네...”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하는 이지의 표정이 뭘 말하려는 건지 은옥은 눈치챈 듯했다. “아... 그럼 명훈이 딸이?” 은옥이 얼른 대답했다. “네. 저예요.” 졸지에 아빠를 바꿔치기 한 두 여자는 박봉술이 가져온 홍삼음료 박스를 뜯어 한 병을 그에게 권했다. “딱히 드릴 게 없어서...”


“아냐. 아냐. 괜찮아... 흠... 아니 근데 어쩌다가 우리 명훈이가... 아니, 세상에... 참... 어느 미친놈들이 우리 명훈이를... 상태는 좀 어떤가?” “오늘 이것저것 찍어보고 검사할 건가 봐요. 그런데... 박 편집국장님이 우리 사장님 아버지랑 아는 사이셨다니. 이것도 인연이네요.” “허... 그러게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명훈이 이렇게 만든 놈들을 꼭 잡아야 하는데...” 무척이나 슬픈 얼굴로 중얼거리는 박봉술을 노려보며 이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뱀 새끼, 이제 보니 악어구나.


아직 잠들어 있는 안명훈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봉술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이지도 따라나섰다. “같이 나가시죠. 저도 이제 가봐야 해서... 언니. 힘 내구... 가볼게, 난.”


병원 정문을 나서 각자의 방향으로 찢어진 안이지와 박봉술의 머릿속이 각각 복잡해지고 있었다.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이지는 핸드폰에 담겨 있던 그날 밤의 녹음파일을 자신의 이메일 계정에 백업했다. 가가멜의 말대로... 폭행범들과 배후를 잡지 못한다면... 저 뱀 놈을 응징할 방법은 이것뿐이다. 일단 당분간은 내색하지 말자. 우선 가만히 있자. 때가 올 때까지는.


운전석에 앉은 박봉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틀림없이 저 맹랑한 바텐더 계집아이 핸드폰 속에 녹취파일이 남아있을 텐데... 저걸 뺏어야 하나, 훔쳐야 하나...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 박봉술이 핸들을 쾅 내리치고는 시동을 걸었다. “제 친아버지도 아닌데... 뭐 나서기야 할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뭘 좀 먹여야 하나...” 그때 박봉술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인 현병규 시장.


“응. 지금 병원 응급실 들렀다 나왔어... 목숨은 붙어 있어. 내가 반만 죽인다고 했잖아... 근데 말야. 이거 참... 아냐. 아무것두... 넌 내일쯤에나 일반 병실로 옮기고 나면 문병해... 그래. 끊어.”


“304동 경비실 앞에 주차된 9302번 차량의 차주께서는 지금 즉시 차량을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304동 경비실 앞에...” 거실 스피커를 통해 쩌렁거리는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의 목소리에 이지는 잠에서 깨어났다. 오후 2시 45분. 아... 너무 오래 자버렸다. 대충 세수만 한 이지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이지의 아빠는 일반병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은옥과 함께 주치의 방을 노크하는 이지의 손이 저도 모르게 떨고 있었다. 애증... 이런 건가. 치가 떨리게 미워서 두 번 다시는 얼굴도 보기 싫었던 아빠인데... 막상 저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는 아빠를 본 이지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뇌 손상입니다. 구타로 인해 왼쪽 뇌를 다치셨어요. 신체 오른쪽 편마비, 그리고 언어 기능에 장애가 올 수도 있습니다. 어렵지만 완치가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너무 상심하지는 마시고... 그리고 오른쪽 무릎뼈랑 어깨뼈가 심하게 골절되었네요. 다행히도 다른 내상은 없구요. 당분간 입원 치료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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