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손상입니다. 구타로 인해 왼쪽 뇌를 다치셨어요. 신체 오른쪽 편마비, 그리고 언어 기능에 장애가 올 수도 있습니다. 어렵지만 완치가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너무 상심하지는 마시고... 그리고 오른쪽 무릎뼈랑 어깨뼈가 심하게 골절되었네요. 다행히도 다른 내상은 없구요. 당분간 입원 치료가 필요합니다.”
9월 1일. 아침. 낡은 경차 운전석.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다 태연은 라디오를 켰다.
“9월의 시작입니다. 어제와 오늘. 공기가 다르게 느껴지시나요? 8월의 끝과 9월의 시작. 사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죠. 시계의 초침이 8월 31일 24시를 지나는 순간에, 뭔가가 특별하게 달라지는 건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 아날로그의 흐름 곳곳에 디지털이라는 바늘을 꽂아서 끝과 시작. 어제와 오늘.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 그리고 새로움이라는 가치와 느낌을 만들어 내지요. 자. 어쨌든 이제 9월입니다. 단지 달력의 새 장을 만나는 것, 그 이상의 상쾌함이 마음으로 스며드는 9월의 첫날. 정말 이제 가을이구나 싶은 오늘 아침. 첫 음악은 바흐의 곡으로 준비했습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 작품번호 1043번.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제1악장. 오이스트라흐 부자(父子)의 바이올린으로 듣습니다.”
오랜만에 듣는다. 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빛나는 바흐의 음악들 중에서 태연이 가장 좋아하는 곡. 아버지 오이스트라흐와 아들 오이스트라흐의 바이올린은 싸우다, 화해하다, 경쟁하다, 양보하다, 주거니 받거니 어울리며 듣는 이의 마음을 한껏 들어 올리며 녹였다. 오랜만에 듣는다. 6년 전, 학교 교실. 어느 가을날 오후. 창가 커튼을 어루만지며 들이치는 햇살 속에서, 이어폰을 각자 귀에 한쪽씩 나눠 꼽고 이 음악을 함께 들었던 그녀. 오늘부터 이제 함께 일한다. 안이지.
임용장 수여식을 앞둔 시청 대회의실은 부산했다. 그새 또 살이 쪘나. 면접 때보다도 더 꽉 끼는 느낌의 검은색 투피스 정장이 이지는 답답했다. 설마 계속 이걸 입고 출근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이지는 정장을 싫어했다. 그리고 정장 차림을 역시 싫어하는 한 남자가 대회의실로 들어섰다. 태연 역시 몇 달 만에 맨 넥타이를 당장 풀어버리고픈 충동을 참으며 입구 자리배치표에서 자신의 이름과 위치를 찾고 있었다.
51번... 번호를 확인하고 자리로 향하려는 태연을 향해 저만치서 누군가가 손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오라는 지시다. 빠른 걸음으로 시청 인사팀장에게 다가가며 태연은 생각했다. 저 아저씨가 날 왜 부르는 거지? 날 잘 알지도 못할 텐데... 시 직원 인사업무를 총괄하는 인사팀장은 실세 중의 실세. 직급은 6급 주사지만, 실제 권한은 웬만한 과장보다 막강한 그가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태연은 썩 달갑지는 않았다.
“너 시의회 의장이랑 무슨 사이냐?” “네? 무슨? ... 저 그분 잘 모르는데요.” 태연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인사팀장은 영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태연을 노려보았다. “그래? 그럼... 시의원들 중에서 혹시 아는 사람 있어? 친척이나... 뭐 옆집 아저씨든 뭐든.” “없는데요...” 반사적으로 대답하다가 태연은 뭔가 아차 싶은 느낌과 함께 며칠 동안 풀리지 않았던 숙제의 답을 찾았다. 장세연... 니 짓이구나... 니가 의장에게 부탁해서 나를 의회로 불러들였구나...
“의장이 콕 찍어서 이번 인사에서 널 달라고 했어. 누구 낙하산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가서 잘해.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말고 적당히만. 그리고 너무 의원들하고 친하게 지내지 마. 동화되지도 말고. 너 거기 천년만년 있는 거 아냐. 니 인사권자는 시장님이라는 거. 잊지 마.”
시장은 야당인 새정치당 소속. 시의회는 여당인 평화당이 다수당. 임기 개시 후 9월 첫 정례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의회와 시 집행부 간의 기싸움은 이미 시작된 것 같았다. 근본적으로 대립적인 위치에 마주 선 집행부와 의회는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 게다가 시장이 소속한 정당과 의회 다수당이 다른 판국이니. 그리고... 재선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4년 후 3선을 벌써부터 노리고 있을 현병규 시장 눈에, 시의원들은 차기 시장 선거의 잠재적 경쟁자들. 이러다 보니 의회 소속 직원들은 포지션이 애매하고 난처할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집행부에 비해 업무 부담이 적고, 각종 근무와 행사 동원에서 열외 되기에 한편으로는 직원들이 선망하는 부서이기도 하지만... 시장과 의원들 눈치를 동시에 살필 수밖에 없는 햄버거 사이에 낀 고기 패티 같은 신세. 선거 기간 중 반대 후보를 지지하는 간부급 공무원들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었다는 현병규 시장 체제에서 의회사무과 근무는 순탄치 않겠구나... 태연의 생각을 깨려는 듯, 마이크를 쥔 인사팀장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시장님 들어오십니다. 모두 자세를 바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병규. 동네 구멍가게 주인에서 한산시장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 직원들은 그를 독사라고 불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생김새나 성품이나 딱 독사를 닮았으니까. 웃음 가득한 얼굴로 현병규 시장은 직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순서대로 임용장을 하사하며 악수를 나눴다.
현직 공무원들에 대한 승진과 전보 임용장 수여가 모두 끝나자, 신규 임용자 순서가 돌아왔다. 속기직인 안이지는 현병규와 악수를 나누는 맨 마지막 신규 직원. “안이지. 지방속기서기보에 임함. 의회사무과 근무를 명함. 한산시장.” 다소곳이 임용장을 받고 악수를 하며 안이지는 현병규 시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대회의실에 도열한 100여 명 직원들 중 유일하게 자신의 눈을 당돌하게 쳐다보는 젊은 신규 여직원의 눈초리에 시장은 슬쩍 당황한 것 같았다. 그리고는 마치 며칠 전 바 <쁘렘>에서 박봉술이 그랬던 것처럼 이지의 눈매를 잠깐이지만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제 보니... 아주 낯이 익은데... 눈매가 딱... 혹시 아버지 함자가 어떻게 되시나?’ 현병규도 지금... 박봉술 한산타임즈 편집국장이 던졌던 질문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지는 알 수가 있었다. 훈시를 위해 연단을 향해 몸을 돌리려다 현병규 시장은 다시 한 번 이지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바로 전날, 현병규가 안명훈이 입원한 병실을 찾았을 때는 이지 대신 은옥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이지를 처음으로 본 현병규도 그녀가 안명훈의 딸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아직은.
시청 본관 건물을 나와 태연과 이지는 임용장을 들고 의회청사를 향해 나란히 걸었다. “아버님은 좀 어떠셔?” 어렵사리 입을 떼며 조심스럽게 태연은 이지의 표정을 살폈다. “그냥... 그래...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 태연은 더 묻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을 머리에 이고 둘은 의회청사로 다가갔다. 중앙현관으로 향하는 계단을 막 오르려는 그때, 현관 앞 주차장으로 쥐색 SUV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리고 만 24세, 역대 최연소 한산시의원 장세연이 차에서 내렸다.
정장 차림의 세 남녀. 가윤고등학교 3회 동창생이자 고교 영화 동아리 ‘은막 위 잔물결’ 창단 멤버 세 남녀.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는 안이지, 유태연, 장세연을 5층 높이 한산시의회 청사가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