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월의 애벌레 – 제29화
한정식 식당 <설하(雪夏)>의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밤 8시 반. 태연은 복싱 체육관에 들어섰다. 옷을 갈아입고 샌드백을 툭툭 치며 몸을 풀고 있는데 누군가 태연의 어깨를 쳤다. 태연이 고개를 돌렸다. 시의원 기은석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의원님... 여긴 어쩐...?” 일로 온 거냐고 묻다가 태연은 말꼬리를 삼켰다. 운동복 차림에 글러브를 끼고 있는 기은석도 여기 운동하러 온 것이 분명할 테니... “유태연 씨도 여기서 운동하세요? 이렇게 또 만나게 되니 반갑네요. 저는 다른 체육관에 다니다가 며칠 전부터 이리로 옮겼어요.” 각자 땀을 흘리면서 1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은 함께 복싱 체육관을 나섰다.
“이젠 제법 밤바람이 서늘하네요. 시간 괜찮다면 저기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어때요?” “아. 의원님. 제가 차를 가져와서... 저는 그냥 다른 것 마시겠습니다.”
맥주 한 캔, 콜라 한 캔을 각자 앞에 두고 기은석과 유태연은 편의점 앞 파라솔 벤치에 마주 앉았다. “복싱은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전 이제 한 1년 정도밖에 안 됐어요.” “3년 좀 넘었습니다.” “와. 3년 했으면 제법 실력이 상당하겠는 걸요?” “그냥... 취미 삼아 하는 거라서... 그 정도는 아닙니다.” “무슨 군대도 아니고... 그렇게 딱딱하게 다나까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의회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잖아요, 우린... 편하게 대해 주세요.”
표정이나 말투나 참 사람을 편안하게 하면서 친근함 느끼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그러니까 정치를 하는 거겠지? 태연은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는 기은석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때 조그만 깡통에 든 땅콩 한 줌을 털어 넣은 기은석이 태연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런 질문드려도 괜찮을지... 대답하기 곤란하면 말 안 하셔도 괜찮아요... 장세연 의원님이랑 안이지 씨, 유태연 씨... 세 사람, 원래부터 알던 사이 맞죠?”
그래 눈치도 빠르구나. 그러니까 정치를 하는 거겠지? 태연은 또 생각했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고... 언젠가는 알게 될 테고... “네.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어쩐지... 그랬군요.” 뭔가를 생각하는 듯, 기은석은 맥주캔의 상표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아! 하나 더 물어봐도 될까요? 그냥 궁금해서... 안이지 씨... 혹시 남자 친구 있나요?”
표정이나 말투나 참 사람을 편안하게 하면서 친근함 느끼게 하는... 네 재주는 딱 아까 전까지만 이구나. 기은석에게 느끼고 있던 태연의 호감이 파삭 깨졌다. 네가 그걸 왜 궁금해하지? 본능적으로 태연은 기은석 의원을 노려보았다. “내가 이지 남자 친구다! 아직도!” 라고 할 뻔하다가, 태연은 짐짓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가을 밤길, 걷기 좋잖아요?” 집에 태워다 주겠다는 태연의 제안을 사양하고 기은석은 가로등 불빛을 맞으며 총총 걸어갔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면서 태연은 다시 이지를 떠올렸다. 다시...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다시...
장세연 의원과의 만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박봉술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아까 전, 술자리 중간에 담배를 피우며 나눈 강혁찬 감사담당관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그 바텐더 계집애가... 의회 속기사가 됐다고? 그 아이 이름이 뭐라고?” “안이지, 안이지랍니다.” “...... 안...이지? 성이 안 씨야?” “네. 제가 걔 면접을 봤었어요. 꼴도 보기 싫어서 점수를 바닥으로 긁었는데도 살아왔더라고요. 그리고는 오늘 첫 출근한 날... 그 메신저를 전 직원한테 보냈다는 거 아닙니까. 시장님한테 불려 가서 된통 깨졌어요. 내... 이 맹랑한 것을 그냥... 에휴...” “그냥 지나가고 말 술집 계집애인 줄 알았는데... 기분 나쁘게 계속 따라붙네... 너 기억하지? 그날... 그 년이 우리 대화 전부 녹음했던 것... 거기 블랙리스트 얘기도 들어 있을 텐데...” “뭐... 설마 그게 문제가 되겠어요? 무슨 소리인지도 잘 모를 겁니다. 그 꼬마 애는.” “그게... 그 계집애 눈매가 말이야...” “네?” “묘하게 안명훈이를 닮았어. 안명훈이 자식 묵사발 만든 다음날, 내가 응급실에 병문안을 갔는데... 그 년이 거기 있더라니깐. 뭐... 말로는 그 년 말고 그 바 여사장 아버지라고는 하던데... 왠지 그 바텐더인지 속기사인지 그 안이지라는 여자애가 명훈이 딸인 것 같아. 이제 보니 성도 같고...”
시장 바닥, 리어카를 끌고 구두를 닦으며 맨주먹으로 밑바닥을 기면서 굵어진 잔뼈로 ‘밤의 한산시장’이라는 자리까지 치고 올라온 박봉술의 육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결정적인 갈림길에서마다 그 육감 하나로 길을 뚫고 살아온 박봉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더럽다. 기분이 더럽다. 뭔가 기분 나쁜 일이 가까운 미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육감이 들었다. 그런데... 딱히 방법이 없다. 안명훈을 반신불수로 만들어 버린 지금, 그 이상으로 손을 쓰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그 바텐더인지 속기사인지 계집애 핸드폰에 들어 있는 그 녹취파일... 그때 응급실에서, 안이지는 왜 안명훈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감춘 걸까... 캔에 남은 맥주를 마저 삼키며 박봉술은 담배를 비벼 껐다. 거실 벽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종을 치고 있었다.
9월 4일. 제11대 한산시의회 개원 후, 첫 제1차 정례회가 시작되는 날 아침. 의회 속기사로 정식 데뷔하는 안이지가 옷장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이건 내 탓이야... 내 탓. 살이 찐 거야... 몇 해 전에 샀던 정장들이 죄다 몸뚱이를 옥죄는 이 지경이 된 건 내 탓이야... 누굴 탓할 일이 아니지. 면접 때 입었던 그 갑갑한 검은색 정장 투피스를 입고 하루를 버틸 자신이 도저히 없다고 결론 내린 이지는, 그나마 좀 단정해 보이는 면바지와 셔츠를 옷장에서 꺼냈다. 무슨 장례식장 가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차림이면 무난하겠지. 청재킷을 걸치고 집을 나서는 이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의 옷 선택이 잠시 후 무슨 일을 불러올지...
나름 뛰어나다고 자부했던 이지의 육감이, 이번에는 발동되지 않고 잠자코 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