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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불꽃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30화

by rainon 김승진

9월 4일. 제11대 한산시의회 개원 후, 첫 제1차 정례회가 시작되는 날 아침. 의회 속기사로 정식 데뷔하는 안이지가 옷장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이건 내 탓이야... 내 탓. 살이 찐 거야... 몇 해 전에 샀던 정장들이 죄다 몸뚱이를 옥죄는 이 지경이 된 건 내 탓이야... 누굴 탓할 일이 아니지. 면접 때 입었던 그 갑갑한 검은색 정장 투피스를 입고 하루를 버틸 자신이 도저히 없다고 결론 내린 이지는, 그나마 좀 단정해 보이는 면바지와 셔츠를 옷장에서 꺼냈다. 무슨 장례식장 가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차림이면 무난하겠지. 청재킷을 걸치고 집을 나서는 이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의 옷 선택이 잠시 후 무슨 일을 불러올지... 나름 뛰어나다고 자부했던 이지의 육감이, 이번에는 발동되지 않고 잠자코 자고 있었다.


10시 정례회 개회를 1시간 앞둔 한산시의회 직원들 모두가 분주했다. 태연이 회의 진행 시나리오와 의장의 개회사 최종안을 점검하는 사이, 이지는 속기 전용 키보드와 회의 녹음기의 정상 작동 여부를 체크했다. 방송 장비와 회의 운영 시스템을 담당하는 전산직 직원은 7명 의원석의 마이크 상태와 회의장 전면 대형 스크린에 비치는 카메라 각도를 최종 확인하느라 본회의장 여기저기를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9시 40분이 되자, 개회식 참석을 위해 의회 청사 중앙현관으로 들어서는 현병규 시장과 간부 공무원들을 의회사무과장과 의정팀장이 정중히 맞았다. 개회식 전 티타임을 위해 의장실로 들어가는 시장과 국장들을 안내하고 난 지선아 의사팀장은 출입기자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개회식 직후 있을 두 명 의원의 5분 자유발언 원고를 배부했다. “박 국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우리 지 팀장은 그 사이 더 젊어지신 것 같네. 오늘 발언자 누구야? 뭐 특별한 것 있나?” 본회의장에 들어서며 지선아 팀장과 악수를 나누던 박봉술 한산타임즈 편집국장은 방청석 뒤편에 앉은 정재호 우리신문 편집국장을 발견했다. 박봉술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가가멜을 닮은 정재호가 박봉술을 보고 자리에 앉은 채로 가볍게 목례를 했지만, 박봉술은 그 인사를 무시하고 방청석 앞쪽에 앉았다.


9시 55분. 티타임을 마친 7명 의원들과 시장은 의장실에서 나와 본회의장으로 향했다. 그때 달칵, 본회의장 앞 화장실 문이 닫히는 인기척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잠시 쏠렸다. 이지가 막 화장실에서 나오는 참이었다. 이지를 향해 반갑게 미소를 보내는 기은석 의원 바로 옆에 서있던 현병규 시장이 이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임용장 수여식 이후 두 번째로 이지를 마주한 현병규 시장은 안이지의 눈매가 누구를 닮은 건지 드디어 알아챘다. 자신을 배신한 대가로 반신불수가 되어 병원에 누워 있는 선거 사무장 안명훈의 두 눈과 똑같이도 생겼다. 현병규의 등골 사이로 살짝 오싹한 기운이 흘러 내려갔다. 출근 첫날, 강혁찬 감사담당관의 술자리 행패를 시장을 포함한 전 직원들에게 메신저로 터뜨린 그 여직원이 바로 너구나. 짧은 2초 동안 현병규의 머릿속을 스치는 묘한 기분을 깬 것은 장세연 의원이었다.


“과장! 의회사무과장! 이리로 나와 보세요!” 앙칼진 세연의 목소리에 놀란 의회사무과장이 본회의장 안쪽에서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네. 의원님. 무슨 일로...?”


“도대체 직원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죠?” “네?” “이 속기 직원 옷차림! 이게 뭐예요? 여기가 무슨 캠핑장인가요? 의원들, 직원들 전부 다 정장 차림인데!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기본적인 예의도 안 가르칩니까?”


이지의 얼굴이 빨개졌다. 회의장 바깥의 소란이 궁금한 본청 과장들과 출입기자들도 본회의장 출입문 쪽을 일제히 바라보았다. 회의장 안에 있던 태연도 깜짝 놀라 밖으로 달려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이지를 향했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체크무늬 남방셔츠 위로 걸친 청재킷. 아... 전보인사 발령 후 첫 정례회 준비에 정신이 팔려서 미처 제대로 볼 틈도 없었던 이지의 옷차림에 태연도 당황했다. 안이지... 너답게 입었구나. 그런데 저 정도면 그래도 무난한 것 같은데... 그럼 그렇지... 장세연, 제대로 꼬투리를 잡았구나. 이지를 개망신시킬 핑곗거리 잡았구나.


“죄송합니다. 의원님. 당장 갈아입게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안이지 씨! 다른 날도 아니고 정례회 개회식에 옷차림이 그게 뭐야?” 시장 코앞에서, 막내딸 뻘인 20대 중반 시의원에게 면박을 당한 50대 후반의 의회사무과장은 안이지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풀이를 던졌다. 현병규 시장도 이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혀를 쯧쯧 거렸다. 출입문 앞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박봉술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 옆에는 고소해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의 강혁찬 감사담당관. 그때, 장세연의 호통을 듣자마자 1층 사무실로 황급히 내려갔던 의사팀장 지선아가 자신의 여벌 정장 재킷을 가지고 올라왔다. 의원들과 시장이 본회의장으로 들어가자 지선아 팀장은 이지에게 정장 재킷을 건넸다. “청재킷 벗고, 우선 이거 입어요.”


“의사팀장입니다. 지금부터 제287회 한산시의회 제1차 정례회 개회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국민의례를 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정면의 국기를 향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은 두 남자의 시선이 이지에게로 향했다. 귀로 들어오는 의사팀장의 진행 멘트를 손가락 끝으로 남기는 이지의 표정은 담담하고 차분했다. 기은석 시의원과 유태연이 느끼고 있는 착잡한 안타까움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이지는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그러다가... 그렇게 구석 속기석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키보드만 두드리는 이지의 손등 위로 툭, 짠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의례가 끝나면서 이지의 인내도 끝나버렸다. 속기석에서 일어난 이지가 뚜벅뚜벅 장세연 의원석으로 걸어갔다. 자리에 앉아 있는 고교 동창생의 얼굴을 잠깐 내려다보던 이지의 눈에서 얼음 빛이 쏟아졌다. 이지는 차갑게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뜨겁게 내리쳤다. 짝! 불꽃이 장세연 의원의 뺨에서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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