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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31화

by rainon 김승진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의례가 끝나면서 이지의 인내도 끝나버렸다. 속기석에서 일어난 이지가 뚜벅뚜벅 장세연 의원석으로 걸어갔다. 자리에 앉아 있는 고교 동창생의 얼굴을 잠깐 내려다보던 이지의 눈에서 얼음 빛이 쏟아졌다. 이지는 차갑게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뜨겁게 내리쳤다. 짝! 불꽃이 장세연 의원의 뺨에서 튀었다.


악! 장세연 의원의 따귀를 후려친 이지가 속기석으로 돌아와 앉는 것과 동시에 장세연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본회의장 안의 모두가 그 소리에 당황하고 있을 때, 이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던 태연은 속기석에 앉아있는 이지의 자세가 순식간에 바뀐 것을 놓치지 않았다. 석 달 전 일이 생생하게 태연에게 떠올랐다.


수험번호 01034014, 마지막으로 응시생 안이지의 책상을 향해 왼쪽 옆에서 천천히 감독 조원 유태연이 다가갔다. 아주 조심스럽게 책상 좌측 상단 귀퉁이 그녀의 OMR 답안지에 서명을 했다. 가만히 파란색 볼펜을 손에 쥔 채로 머리를 숙인 안이지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1초, 2초, 3초... 그녀의 고개 숙인 옆얼굴을 근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태연은 화들짝 놀랐다. 분명 책상에 엎드리듯 머리를 숙이고 있던 안이지가 고개를 들고 태연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100미터 전력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고개가 움직이는 것을 전혀 못 봤는데, 영화로 말하자면 필름 중간에서 컷들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최소한 100 프레임이 증발한 것 같았다. 공포 영화 속 화면을 향해 몇십 걸음을 순간 이동해서 관객에게 달려드는 귀신을 보는 기분이었다.


데자뷔. 태연이 석 달 전의 미스터리를 다시 만나는 기시감을 똑똑히 느끼고 있을 때, 장세연 의원 바로 옆자리의 기은석 의원은 비명을 듣고 세연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 괜찮으세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장세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아... 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장세연 의원의 기색을 잠깐 살피던 지선아 의사팀장은 회의 진행을 계속했다. “다음은 의장님의 개회사가 있겠습니다.”


개회일 의사일정이 모두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온 세연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왼쪽 뺨이 살짝 부어 있었다. 분명 따귀를 맞은 것 같은 아픔이었는데... 뭐였지? 누가 뭘 던진 거였나? 정전기였나? 뭐였지? 고개를 흔들며 기분 나쁜 그 기분을 떨치고 화장을 다시 고친 세연이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입술을 달싹거렸다. 오늘... 그래 오늘이야. 책상 앞에 앉은 세연은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의회사무과 유태연 입니...” “장세연 의원입니다. 유태연 주무관님, 오늘 저녁 시간 혹시 괜찮으신가요?” “네? 아... 그...” “따로 약속 없으신 것 같은데, 저녁 함께 하시죠. 장소는 이따가 알려드릴게요.” 뭐라 대답하지? 어버버버 당황한 유태연이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세연은 탁 전화를 끊었다.


뒤이어 수화기를 내려놓은 태연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어폰으로 오전 회의 녹취를 들으면서 속기 초안을 정리하는데 이지는 열중하고 있었다. 오전에 세연으로부터 봉변당한 이지를 위로하려 저녁식사를 제안할까 고민하던 차에 덜컥 세연과 저녁을 먹게 되어버린 상황에 태연은 답답해졌다. 그래도... 감사하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이지와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니...


처음 와 보는데... 한정식 식당 <설하(雪夏)>의 내부는 생각보다도 훨씬 고급스러웠다. “안녕하세요. 유태연 씨죠? 의원님,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언제 옷을 갈아입은 건지. 세연은 낮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캐주얼 차림의 세연은 시의원 장세연이 아니라 고등학교 친구 장세연의 모습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태연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시간 내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의원님께서 부르신 건데 당연히 와야지요.” “태연아.” “......” “앞으로 둘이서 있을 때는 절대 존댓말 하지 마. 너랑 둘이 있을 때는 나 시의원 아니야. 그냥 세연이야.”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세연이 술병을 들어 태연의 잔을 채웠다. “나도 한 잔 줘.” 술병을 건네받은 태연이 세연의 잔을 채웠다. 잔을 부딪치고 세연은 주욱 남김없이 잔을 비웠다. 태연은 마시지 않고 잔을 내려놓았다.


“태연아.”

“...... 응?”

“우리... 결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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