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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죽음과 한 죽음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32화

by rainon 김승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세연이 술병을 들어 태연의 잔을 채웠다. “나도 한 잔 줘.” 술병을 건네받은 태연이 세연의 잔을 채웠다. 잔을 부딪치고 세연은 주욱 남김없이 잔을 비웠다. 태연은 마시지 않고 잔을 내려놓았다.


“태연아.”

“...... 응?”

“우리... 결혼하자.”


태연은 내려두었던 술잔을 들어 잔을 비웠다. 탁! 잔을 내려두며 태연이 입을 열었다. “세연아, 난...” 세연이 가로막았다.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돼. 아니,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세연은 술병을 들어 빈 잔 둘을 채웠다. “너를 다시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어. 이젠... 놓치지 않아, 절대.”


눈앞에 놓인 앞접시에 새겨진 두 글자, 한정식 식당 이름 <설하(雪夏)>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태연은 말이 없었다. 눈 내리는 여름... 쨍쨍 맑은 여름 햇살을 반짝 받으면서 곱게 내리는 눈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안이지, 장세연... 누구의 여름 속으로 나는 내리고 있는가. 태연은 어지러웠다. 어지러움을 느끼는 스스로가 어지러워졌다. 그 사이 상에는 코스대로 하나씩 요리가 놓였다. “여기 처음이지? 여기 음식 제법 괜찮아. 먹자.” 몇 차례 잔을 부딪치며 태연은 취기가 올랐다. 아까 식당 출입문에 들어서면서 태연은 마음속으로 다짐했었다. 하지만 “오늘 세연이 앞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던 그 결심은, 느닷없이 훅 치고 들어온 세연의 청혼에 무너지고 말았다. 계속 잔을 채우면서, 세연은 지난 6년간 태연과 둘 사이 공백도 채워갔다.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고, 일찌감치 새정치당에 가입해서 정당활동을 했던 이야기들. 수줍음 많고 소극적이던 세연의 성격이 정반대로 바뀌게 된 것은 일찍 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형수술로 얼굴을 고친 얘기도 스스럼없이 털어놓으며 반짝이는 눈으로 맑게 재잘거리는 세연의 이야기에, 태연은 빠져들었다. 그리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알코올 속으로 태연은 차츰 빠져들었다. 취하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다가...


정신을 차린 태연의 눈 바로 앞에서 세연의 분홍색 젖꼭지가 파들거리고 있었다. 태연은 눈을 감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했던 이성은 스물다섯 끓는 욕망에 녹아버렸다. 설하(雪夏). 여름이 눈을 이겼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앞에서 녹아내리는 눈처럼, 태연과 세연은 서로에게 녹아들어 갔다. 살며시... 세연의 핑크빛 젖꼭지를 깨물며 태연은 그녀 안으로 들어갔다. 6년 전의 밤을 비추던 달빛이 세연의 아파트 침실 틈으로 되살아 들어와 두 남녀의 벗은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그런다지... 정사(情事) 끝의 절정은 ‘작은 죽음’이라고. 태연과 세연이 ‘작은 죽음’을 함께 맞고 있는 바로 그 순간.


한산병원 중환자실. 안명훈의 심장은 계속되는 전기충격에도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당직의사 이마에서 툭 낙하하는 땀방울의 허공 속 궤적이 이지에게는 슬로 모션이었지만, 땀방울이 아빠의 얼굴에 떨어지는 것을 끝내 막을 수는 없었다. 시간아, 느리게 흐르라. 시간아, 느리게 흐르라. 그렇지만... 아무리 느려도 시간은 결국 흐른다. 간절한 이지의 세 번째 기도도 ‘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직의사가 이지를 향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운명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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