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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장미가 자라는 곳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33화

by rainon 김승진

프랑스에서는 그런다지... 정사(情事) 끝의 절정은 ‘작은 죽음’이라고. 태연과 세연이 ‘작은 죽음’을 함께 맞고 있는 바로 그 순간.


한산병원 중환자실. 안명훈의 심장은 계속되는 전기충격에도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당직의사 이마에서 툭 낙하하는 땀방울의 허공 속 궤적이 이지에게는 슬로 모션이었지만, 땀방울이 아빠의 얼굴에 떨어지는 것을 끝내 막을 수는 없었다. 시간아, 느리게 흐르라. 시간아, 느리게 흐르라. 그렇지만... 아무리 느려도 시간은 결국 흐른다. 간절한 이지의 세 번째 기도도 ‘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직의사가 이지를 향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운명하셨습니다.”


‘작은 죽음’을 함께 맛본 태연과 세연은 침대 위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먼저 잠든 것은 세연이었다. 자신의 품에 살포시 안겨 새근거리는 세연의 얼굴을 태연은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6년 전에 그러했듯이, 그녀의 유혹 앞에서 녹아내리고 만 태연은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알몸의 세연을 안은 채로 태연은 눈을 세차게 감았다. 절대 떠올리지 않으려 기를 쓰면 쓸수록 눈앞에 어른거리는 이지의 모습은, 감은 눈꺼풀 위로 더욱 선명해지고 있었다. 이지에게로 돌아가는 다리를 끊어버린 건가. 아니, 헤엄쳐서라도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도 되는 것일까. 문득 태연은 생각했다. 오르가슴은 작은 죽음이라던가. 섹스와 죽음. 이제 이지를 향한 마음은 죽어야 하는 건가.


그때 잠 기운에 몸을 뒤척이는 세연의 목을 덮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살짝 흘러내렸다. 6년 전의 밤에는 없었는데...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었는데... 커튼으로 들이치는 달빛 아래 세연의 봉긋한 가슴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손바닥 절반 크기의 빨간 장미 문신. 아... 장미... 태연의 가슴이 저며 왔다. 6년 전, 영화 동아리 <은잔>. 동아리방에서 이지와 세연과 태연, 셋이 함께 보았던 영화. 박찬욱 감독의 초기작 <3인조>.


영화 막바지. 경찰들이 포위한 창고 안에서 서로를 안은 남주인공과 여주인공. 여자와 나눈 처음이자 마지막 섹스를 지상의 마지막 추억으로 안고 죽어가는 남자. 둘의 처음이자 마지막 정사(情事) 장면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닉 케이브’와 ‘카일리 미노그’가 부른 <Where the wild roses grow>였다. 영화 못지않게 그 곡에 푹 빠져든 태연은 영화가 끝나고 그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찾아 틀었다. 역시나 노래 가사도 뮤직비디오의 내용도 ‘섹스’와 ‘죽음’이었다.


뮤직비디오 속의 들장미를 보면서 태연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었다. “장미... 참 예쁘다. 화면이지만 이렇게 예쁜 장미는 처음 봐.” 영화도 뮤직비디오도 내내 시큰둥하게 보던 이지가 흘려들은 그 말을 귀담아듣고 반응한 것은 세연이었다. “나중에 말야. 니 연인이 저런 빨간 장미 문신을 몸에 새긴다면 어떨 것 같아?” “아! 난, 반가울 거 같아! 좋아!” “그래? 정말?”


태연이 세연의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빨간 장미를 가슴에 새기고 다시 돌아온 그녀는 주방에서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 먼저 가 볼게. 누가 보기라도 하면... 그렇잖아. 출근도 어서 해야 하고...” “먹고 가. 한 숟갈이라도. 누가 좀 보면 어때? 우리가 무슨 죄 지었니?”


넌 아닐지 몰라도... 난 죄를 지었거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태연은 식탁 앞에 앉았다. 북엇국이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괜찮은 맛에 밥 한 공기를 다 비워낸 태연이 먼저 아파트 현관을 나서려는데 세연이 말했다. “언제든 편하게 와. 현관문 비밀번호, 네 생일이야... 이따 의회에서 봐!”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은 태연은 차 시동을 걸면서 몇 년 만에 그 곡을 찾아 재생했다. <Where the wild roses grow>. 들장미가 자라는 곳... 나 스스로도 잊고 있던 들장미를 넌 기억했구나. 들장미는 네 가슴에 뿌리내려 자라고 있었구나. 세연아. 하지만 나는 아직... 아직도...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인사를 건네며 자리의 컴퓨터를 켜는 태연을 맞이하는 의사팀장 지선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지는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대번에 드는 불길한 느낌.


“안이지 씨... 아버지가 지난밤에 돌아가셨대.”


https://youtu.be/S79vk7IxQ2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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