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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34화

by rainon 김승진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인사를 건네며 자리의 컴퓨터를 켜는 태연을 맞이하는 의사팀장 지선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지는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대번에 드는 불길한 느낌.


“안이지 씨... 아버지가 지난밤에 돌아가셨대.”


“...... 아...” 멍하니 서있는 태연을 대신해서 지선아 의사팀장이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다행히 오늘 회의 속기는 퇴직하신 전임자 분이 대신해 주시기로 했어요. 이후 상황은 좀 봐야 할 것 같아. 오늘 일정은 작년 회계연도 결산 승인안 검토라서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당장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행정사무감사가 문제네... 윤 계장님이 이지 씨 대신에 한 일주일 정도 고생해 주실 수 있을지... 윤 계장님도 분식집 막 개업하고 정신이 없으실 텐데... 그나저나 이지 씨 어떡하니... 발령받자마자 슬픈 일을 당해서... 의회 직원들은 퇴근 후에 다 같이 빈소 찾기로 했어요. 태연 씨도 그럴 테고, 나도 마음이 아프고 무겁지만... 일단 오늘 의사일정은 잘 진행해 봅시다.”


2층 소회의실에서 회의 준비를 마치고 나온 태연은 복도 앞 통유리 밖을 쳐다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높고 파랗던 초가을 하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쥐색 구름 이불이 덮고 있는 하늘 아래로 시의회 주차장에 그 구름 색깔과 똑같은 장세연 의원의 쥐색 SUV가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세연은 쥐색 구름 주름처럼 잔뜩 찌푸린 얼굴로 누군가와 심각하게 통화 중이었다.


“이름이 뭐라고? 유태... 뭐?” “유태연 주무관이요. 행정 8급 직원입니다. 요번에 의회사무과로 전보 발령 왔어요.” “그래? 장 의원이랑 잘 아는 사이인가?” “저랑 가윤고등학교 동창이에요. 박 국장님이 신경 좀 써주시면 좋겠어요. 시청 인사팀 너무하는 거 아닌가요? 한산고 출신 아니면 아예 승진 후보자 명부에도 안 올리는 건가요? 저 이번 행정사무감사에서 이 문제 거론할 수도 있어요.” “어허... 흥분하지 말고... 우리 장 의원님 말씀이신데... 내가 인사팀장 녀석 당장 직접 불러서 조치할 거니깐, 행감에서 지적하는 건 좀 참아요. 걔들도 의회가 인사 문제 따지고 드는 거 상당히 예민해하니까. 이 박봉술이가 책임지고, 그 뭐냐... 이름이 뭐? 유태연? 걔 이 다음번 인사 때 반드시 주사보로 올릴 테니깐. 내 약속할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장 의원 부탁인데.” “그럼, 국장님만 믿을게요. 꼭 챙겨 주셔야 해요.”


소회의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구석 자리에 앉은 태연은 계속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이고 있었다. 뭐라... 위로의 메시지라도 보내야 하나... 아니다. 지금은 무슨 말로도 위안이 되지 못할 터... 지금 당장은 경황이 없을 텐데... 어머니도 안 계시고 형제도 하나 없는 이지가 혼자서 초상을 치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태연은 회의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 그래도 은옥이 누나가 옆에 있겠구나.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또 있었다. 그런 태연의 어두운 표정을 세연은 틈틈이 훔쳐보았다. 회의 시작 직전 장세연 의원은 의정팀장으로부터 속기사 안이지 주무관의 부친상을 보고 받았다. 태연의 얼굴을 그늘지게 한 것이 이지에 대한 걱정과 동정일 거라고 짐작하다 보니 세연은 은근히 화가 났다. 태연이 너한테, 이지는 그냥 동료 직원이고 고교 동창생일 뿐이야! 그렇게 몰입하지 마! 무슨 이유로든, 태연이 네 머릿속에는, 그리고 네 마음속에는 나 장세연이 아닌 다른 여자가 들어가서는 안 돼!


“가족 분. 이제 절 따라오세요.” 안명훈의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이지는 장례지도사의 말을 듣지 못했다. 두 눈이 퉁퉁 부은 사촌언니 은옥이 이지를 감싸 안으며 일으켜 세웠다. “이지야. 아빠 보러 가자. 지금 아니면 이제 못 본다잖니... 이지야...”


입관실 벽과 천장과 바닥은 온통 흰색이었다. 이지는 눈이 아팠다. 입관실 내부의 여섯 면은 경쟁하듯 제각기 새하얀 빛을 토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은 부셨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방 한가운데 놓인 관 옆에 선 장례지도사가 이지에게 손짓했다. “유족 분. 이리 가까이 오세요.” 이지는 천천히 발을 뗐다. 어젯밤처럼 다시 기도했다. 시간아. 제발 느리게 흘러라. 마지막으로 얼굴 보는 이 시간이 천천히 갔으면. 하지만 이번에는 이지의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관 속의 아빠 이마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댔다. “사람의 귀는 돌아가시고 나서도 한 동안 살아 있다고 해요.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 사랑한다는 말. 해 드리세요.” 장례지도사의 재촉에도 이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입으로도 마음으로도 이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엄마의 입관식이 떠올랐다. 그때 그 엄마의 모습이 겹쳐지는 아빠의 얼굴을 가만가만 내려다보며, 이지는 안명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곁에서 흐느끼던 은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작은 아빠. 사랑해요.” 마지막으로 안명훈의 이마에 다시 손을 가져다 댄 이지는 아빠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마음속으로 셋을 셌다. 하나, 둘, 셋. 고인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 이지는 휙 몸을 돌려 입관실 출입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제... 닫겠습니다.” 이지의 몫까지 대신 오열하는 은옥이 바닥에 풀썩 쓰러지는 소리를 뒤로 하고 이지는 입관실을 나섰다.


“저기... 죄송한데. 담배 하나만 얻을 수 있을까요?” 검은 상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담배를 달라고 하자, 머리가 희끗한 중년 남자는 슬쩍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내 잠자코 담배 한 개비를 갑에서 뽑아 이지에게 건넸다. 이지가 담배를 물자 남자는 조심스레 불을 붙여 주고 흡연구역을 떠났다.


후... 한 모금 내뿜자 그게 신호이기라도 한 듯, 투두둑... 빗방울이 담배연기를 적시기 시작했다. 흡연구역 벤치 파고라 옆 편의점 문은 열려 있었다. 그 밖으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산울림이었다.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하늘도

이별을 우는데

눈물이
흐르지 않네

https://youtu.be/okjG7t6Bi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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