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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토사물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36화

by rainon 김승진

만화에서 가가멜은 스머프를 잡아먹으려 기를 쓰던데... 박봉술이 스머프인가 보구나. 피식 웃으며 다시 빈소로 들어서려는데... 바로 그 스머프가 빈소 입구 전광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스머프는 파란색이 아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한산타임즈 편집국장 박봉술이었다.


빈소 입구 전광판. 국화꽃 사진 옆으로 이지의 아빠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전광판에 이름은 단 둘. 고(故) 안명훈. 자(子) 안이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로 두 이름을 쳐다보던 박봉술은 이지가 다가서는 인기척에 흠칫 놀라며 몸을 돌렸다. 이지는 밝게 웃었다.


“어? 오셨어요? 들어오시지 않고, 왜.” “아... 그래. 음.” 흰 봉투를 부의함에 집어넣은 박봉술은 방명록 서명은 하지 않고 구두를 벗었다. 아직 남아있는 초가을 늦더위의 열기 탓일까, 제 발이 저린 탓일까. 박봉술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다. 구석 테이블로 박봉술을 안내하고 이지는 음식상을 차려 내왔다. 오후 3시. 아직 빈소 안에 조문객은 몇 없었다. 입관식을 마치고 잠시 집에 들르러 나간 사촌 은옥의 7살 아들이 태블릿 PC 게임에 몰두하며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소주 한 잔 드려요?” “주면 고맙지.” 까드득... 녹색 병마개를 돌려 따고 박봉술의 잔을 채운 이지는 미소 띤 얼굴로 박봉술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최대한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기를 쓰는 속내가 뱀 눈깔을 닮은 그 눈에 또렷이 담겨 있었다. 이지는 문득 느긋하며 유쾌한 기분에 젖었다. 이젠 내 차례야. 기대해도 좋아. 이 뱀 새끼야.


“이지 양도 한 잔 하겠나?” “주세요.” 꼴꼴꼴... 작은 종이컵에 소주 떨어지는 소리는 리드미컬했다. 그와는 달리 심장박동이 왠지 불규칙해 보이는 박봉술이 더는 궁금함을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지 양이... 명훈이 딸이었구만. 그런데 왜... 그때 병원 응급실에서는 그걸 숨겼지?” 예상했던 질문. “저... 아빠랑 의절한 지 꽤 됐어요.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는 연락도 거의 안 했구요. 저한테는 아빠라는 사람은 원래 없었어요. 오히려... 사촌인 은옥 언니가 친딸처럼 아빠랑 가까운 사이였죠. 지금도 저는 전혀 슬프지도 않아요. 생물학적으로만 내 아버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슬프지 않다는 말만 빼고는 모두 사실이었다. 그럴싸한 이지의 대답에 박봉술은 ‘정말 그런가?’ 싶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기연가미연가 박봉술의 남아 있는 의심을 마저 날려준 것은 은옥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이지의 몫까지 펑펑 우느라 퉁퉁 부은 눈꺼풀 아래로 붉게 충혈된 눈을 깜빡거리면서, 은옥이 마침 빈소 안으로 들어왔다. “너, 게임 그만 하고 빨랑 숙제 안 해? 아이패드 꺼! 당장!” 7살 아들을 닦달하며 은옥이 이지 옆에 앉았다.


은옥의 눈을 유심히 살피던 박봉술은 잔을 비웠다. “명훈이는... 내가 많이 아끼는 동생이었어. 이렇게 황망하게 가버린 게 믿어지지가 않아. 명훈이를 이렇게 만든 놈들 잡아야 해. 잡으면 내 손으로 죽일 거야. 꼭.”


동네 건달 사이비 기자가 아니라, 너는 영화배우를 했어야 했구나. 키득키득 터지려는 웃음을 삼키느라 애를 쓰는 이지에게 은옥의 아들이 제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쪼르르 다가왔다. “이모! 이거 잘 안 돼. 이모가 좀 해줘.” 7살 꼬마는 아직 태블릿 PC 조작이 서툴렀다. 이지가 몇 번 태블릿을 두드려서 다시 게임을 스타트시키자 아이는 반가운 탄성을 내질렀다.


제법 큰 태블릿 PC 화면으로 꼬마가 슈팅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을 세 사람은 한 동안 지켜보았다. 끝없이 공격해 오는 적기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격추하는 단순한 옛날 오락실 게임에 아이는 꽤 능숙했다. 커다란 적 전투기 한 대가 아이의 전투기를 향해 달려들자, 아이는 슬쩍 피하면서 미사일을 쏘았다. 적 전투기는 폭파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데 폭파되는 바로 그 순간에 적기가 발사한 미사일은 핑그르르 반 바퀴를 돌더니 아이의 전투기를 향해 돌진했다. 이번에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꼬마의 전투기는 공중에서 박살 나고 말았다. 7살짜리는 울상이 되었다.


비슷한 게임이었던 것 같은데... 6년 전, 태연이 핸드폰으로 슈팅 게임을 즐기는 것을 옆에 꼭 붙어 구경하던 그때가 이지에게 생생히 떠올랐다. 같은 상황이었다. 폭파되는 순간에 적 전투기가 날린 미사일에 자신의 비행기가 공중분해되자, 태연은 말했었다. “이게 무서운 거야. 같은 미사일이 아니거든. 소멸의 순간에 마지막 고통으로 던지는 무기에는 한(恨)이 서려 있다니깐.”


박봉술의 시선은 아이의 게임 화면에 꽂혀 있었다. 이지는 잔을 들어 소주를 삼켰다. “죽는 순간에 한을 담아 던진 미사일이 제대로 복수를 했네요. 죽음의 토사물? 맞으면 기분 더럽고 아프겠죠? 그죠?” 이지의 건조한 멘트에 박봉술의 눈이 반짝 빛났다. 뱀 눈깔이 이지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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