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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 목소리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37화

by rainon 김승진

6년 전, 태연이 핸드폰으로 슈팅 게임을 즐기는 것을 옆에 꼭 붙어 구경하던 그때가 이지에게 생생히 떠올랐다. 같은 상황이었다. 폭파되는 순간에 적 전투기가 날린 미사일에 자신의 비행기가 공중분해되자, 태연은 말했었다. “이게 무서운 거야. 같은 미사일이 아니거든. 소멸의 순간에 마지막 고통으로 던지는 무기에는 한(恨)이 서려 있다니깐.”


박봉술의 시선은 아이의 게임 화면에 꽂혀 있었다. 이지는 잔을 들어 소주를 삼켰다. “죽는 순간에 한을 담아 던진 미사일이 제대로 복수를 했네요. 죽음의 토사물? 맞으면 기분 더럽고 아프겠죠? 그죠?” 이지의 건조한 멘트에 박봉술의 눈이 반짝 빛났다. 뱀 눈깔이 이지를 노려보았다.


박봉술의 눈초리를 피하지 않는 이지의 미소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를 향해 이지와 박봉술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 국장님도 와 계셨네요?”


검은색 투피스 정장 차림의 장세연 의원이었다. “어. 장 의원님 오셨어? 부하 직원 부친상에도 이렇게 몸소 찾아오시고... 역시 우리 장 의원은 얼굴만큼이나 마음도 곱다니깐. 이리 와서 앉아요.” “먼저 고인께 인사 올리구요.”


안명훈의 영정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세연은 몸을 돌려 상주인 이지와도 인사를 나눴다. 고개를 들며 서로의 눈이 잠깐 마주쳤지만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연은 구석 테이블 박봉술의 맞은편에 앉았다. “은옥 언니도 오랜만이네요.” “그래... 뭐... 와 줘서 고맙다. 늦었지만 시의원 당선 축하하고...”


“어? 서로 아는 사이야?” “안이지 주무관 하고는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그래서 돌아가신 안이지 주무관 아버님도 전부터 알았고...” “어허. 참 한산시 좁은 바닥일세. 그렇게 또 인연이 되는구만. 그 뭐냐... 아침에 장 의원이 말했던 유태연? 그 직원도 동창이라고 했지, 아마?” “네. 어쩌다 보니 동창 세 명이서 한 건물에서 일하게 되었네요.” “허허. 인연이네. 인연이야 정말. 그래도 역시 우리 장 의원이 제일 출중하네. 시의원이랑 말단 공무원이랑 어디 같은 급인가?”


박봉술의 비아냥을 귓등으로 흘리며 이지는 소주병을 들었다.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 잔 받으시지요. 의원님.” “그럴까요? 대리 부르죠 뭐. 주세요.” 이지가 두 손으로 받쳐 기울이는 소주병에 세연은 한 손으로 든 잔을 가져다 댔다.


장세연과 박봉술 사이에 웃음과 대화와 술잔이 오가는 동안, 이지는 안주와 술을 챙겨 나르며 부지런히 두 상전의 술시중을 들었다. 내내 이지는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 이지의 평온한 모습에 세연은 기가 막혔다. 세연이 하대하거나 말거나 오히려 더 공손히 대하는 이지의 얼굴은 해맑았다. 이지의 낯에서 떠나지 않는 미소는 이지의 자존심을 탄탄히 지키면서 세연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여섯 시가 넘자, 조문객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박봉술도 장세연도 자리에서 일어나 찾아오는 조문객들과 악수를 나누느라 분주해졌다. 현병규 시장이 빈소에 들어선 8시 무렵에는 앉을 자리 하나 없도록 빈소 내부가 붐볐다. 조문객을 맞느라 정신없는 이지를 대신해서, 태연은 입구의 신발들을 정리하고, 음식상을 나르느라 덩달아 바빴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자. 태연은 빈소를 나와 복도 중간 남자화장실로 들어갔다. 바지 지퍼를 올리고 세면대로 향하는 순간,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화장실 구석에서 인기척이 났다. 맨 구석 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서는 알코올 냄새가 진동을 했다. 세면기 수도꼭지를 올리려다 말고, 태연은 멈칫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분명히 있는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었더라? 귀에 익은데... 아... 그놈이다!


태연은 재빠르게 전화기를 열어 녹음기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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