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월의 애벌레 – 제38화
태연은 빈소를 나와 복도 중간 남자화장실로 들어갔다. 바지 지퍼를 올리고 세면대로 향하는 순간,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화장실 구석에서 인기척이 났다. 맨 구석 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서는 알코올 냄새가 진동을 했다. 세면기 수도꼭지를 올리려다 말고, 태연은 멈칫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분명히 있는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었더라? 귀에 익은데... 아... 그놈이다!
태연은 재빠르게 전화기를 열어 녹음기를 켰다.
확실했다. 바로 그 목소리다.
“이 벌레 같은 새끼야! 은혜를 원수로 갚아? 너한테는 새꺄! 공기도 사치다! 배은망덕한 짐승 새끼는 숨 쉴 자격 없어!”
일주일 전, 8월 29일. 안명훈이 괴한들에게 각목 폭행을 당하던 그날 밤. 태연이 듣고 녹음했던, 그 깡패들 셋 중 한 놈의 그 목소리였다. 남자 치고는 얇은 톤의 음성에 비음과 허스키가 묘하게 버무려진 평범하지 않은 목소리. 태연은 귀를 한껏 열었다.
“아니, 그러니깐... 여보세요. 형! 큰 형님!! 박, 봉 자, 술 자! 우리 큰형니임~!!! 제 말씀 좀 들어보시라고요!!! 전화 끊지 마요! 끊지 마! 분명히 말했어! 전화 끊으면 나 바로 경찰서 갈 거야. 다 불어버릴 거야! 뭐? 잘 안 들렸어. 다시 말해 봐요!”
술독에 푹 잠겨 있다가 튀어나오는 것 같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수화기 너머 상대방이 뭔가 길게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태연의 심장은 마구 뛰었다. 핸드폰을 쥔 손에서는 땀이 났다. 화장실 맨 구석 칸 안의 사내는 꺼억, 꺼억, 구역질인지 트림인지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신음을 몇 초마다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내의 술주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꼬부라진 혓바닥을 타고 나오는 목소리는 가뜩이나 작아서 더 알아듣기 어려웠다. 숨을 죽이고 태연은 화장실 맨 끝 칸 문 앞으로 살며시 다가갔다.
“이것 봐요. 봉술이 형!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사람이 죽어버렸잖아! 난 이렇게까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엉? ...... 형님 덕분에 내가 살인자가 됐다고요!!! 뭐? 잘 안 들려! 크게 말해요! ...... 형! 자꾸 같은 말 또 하게 하지 마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합니다. ...... 목숨 하나가 날아갔는데 내 입이 더 비싸지는 건 상식 아닌가? 위험수당이라는 게 있잖아요! 형님도 나도 안전해질 방법은 이것뿐이야! 대신 약속은 꼭 지킬게요. 혹시라도 잡혀도 사형을 먹든 징역을 먹든 나 혼자 먹을게요. 입도 뻥긋 안 할게요. 내, 돌아가신 울 아부지 이름 걸고 맹세할게...... 그래, 그래야지 형. 흐흐흐. 내 계좌 알죠? 응. 그래... 대포통장이야. 괜찮아. 그래. 깔끔하게 딱 한 장만이면 내 아가리에 재봉틀 내가 셀프로 돌린다.”
휴대전화 케이스를 탁 닫는 소리가 났다. 카악~ 퉤. 가래침 뱉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더니, 화장실 구석 칸 안의 사내가 변기 물을 내렸다. 통화가 끝났음을 감지한 태연은 그 전에 미리 화장실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얼굴을 똑똑히 봐야 해. 화장실에서 좀 떨어져 있는 복도 벤치에 앉은 태연은 고개를 약간 숙여 정면을 향한 채 화장실 출입구를 향해 곁눈질로 시선을 고정했다. 사진이라도 찍어두면 좋은데... 저 놈 몰래 촬영은 어렵겠고... 여기 복도에 CCTV가 혹시 있나? 몇 초 동안 태연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화장실 밖으로 나온 사내는 넘어질 뻔, 쓰러질 뻔 아슬아슬하게 복도를 걸어 태연 쪽으로 다가왔다. 목소리만 들었을 때보다도 훨씬 심각하게 남자는 만취해 있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얼굴을 기억해야 해. 신고는 그다음 일이다. 우선 저 놈의 얼굴부터... 그런데... 어?
볼에 난 칼자국 상처가 깊었다. 얇은 목소리의 주인공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180은 족히 넘어 보이는 거대한 덩치의 술떡은 태연 앞을 지나쳐서 고 안명훈의 빈소로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