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비아그라와 은팔찌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39화

by rainon 김승진

비틀거리며 화장실 밖으로 나온 사내는 넘어질 뻔, 쓰러질 뻔 아슬아슬하게 복도를 걸어 태연 쪽으로 다가왔다. 목소리만 들었을 때보다도 훨씬 심각하게 남자는 만취해 있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얼굴을 기억해야 해. 신고는 그다음 일이다. 우선 저 놈의 얼굴부터... 그런데... 어?


볼에 난 칼자국 상처가 깊었다. 얇은 목소리의 주인공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180은 족히 넘어 보이는 거대한 덩치의 술떡은 태연 앞을 지나쳐서 고 안명훈의 빈소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안이지는 밀려드는 조문객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장 최측근으로 오랫동안 일해 온 지역 토박이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찾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마지막 가는 길, 외롭지는 않겠구나.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생각하던 그때, 빈소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 이지? 이지는 소리 나는 쪽으로 향하다가 코를 감싸 쥐었다. 한꺼번에 소주 열병은 마신 것 같은 지독한 술 냄새는 홍해를 갈라내듯이 문상객들을 물리치며 안명훈의 영정을 향해 갈지(之) 자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왼쪽 뺨에 칼자국이 깊게 파인 거구의 사내는 안명훈의 영정 앞에 다소곳이 섰다. 사내가 숨을 내쉴 때마다 진동하는 술 냄새가 역했지만, 이지는 꾹 참고 옆에 비켜서 있었다. 한동안 영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자. 고인에게 큰절을 올리려 몸을 앞으로 굽히던 그는 몸의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지는, 놀라움보다는 빈소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꽝하는 굉음 위로 거대한 덩치의 술떡은 그대로 영정 앞 빈소 바닥에 드러누웠다.


“저기... 괜찮으세요?” 이지가 남자를 부축하려 몸을 숙이자, 남자는 이지를 밀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술냄새와 땀냄새로 찌든 반소매 셔츠가 터질 듯이 남자의 어깨와 팔은 울퉁불퉁했다. 셔츠 반소매 아래 오른쪽 팔뚝 위, 혀를 날름거리는 뱀 세 마리가 뒤엉켜 있었다. 진짜 뱀처럼 생생한 그 문신에 소스라치게 놀란 이지를 보면서 남자는 뭐라고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하지만 뱀 문신 사내는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킨 표정으로 자신의 셔츠 앞주머니에서 바닥에 떨어진 담뱃갑과 라이터를 주워 챙기고는 빈소 입구로 뒤뚱뒤뚱 걸음을 옮겼다.


황당한 표정으로 거구 사내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이지 곁으로 태연이 다가왔다. “바로 저 놈이야. 저 놈!” 귓가에 속삭이는 태연을 향해 이지가 고개를 돌렸다. “뭐?” “저 놈이라니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아니. 아니다. 시간 없어. 우선 잡아야 해!” 태연의 옷을 이지가 잡아끌었다. “유태연! 무슨 소린지 차근차근 말해 봐.” “저 새끼가 아버님을 그렇게 만든 놈이라니까! 내가 방금 다 들었어! 화장실에서!” 이지의 얼굴이 굳어졌다. 태연은 빈소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갔다. 술떡 덩어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 새 어디로 간 거지? 장례식장 건물 밖을 향해 전력 질주하던 태연은 복도 바닥을 적신 빗물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태연은 바로 몸을 일으켰지만, 넘어지면서 날아가 내동그라진 안경이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포기하고 태연은 비가 세차게 내리는 바깥으로 나갔다. 거구 사내가 막 택시 뒷자리에 오르고 있었다. 번호판! 하지만 안경을 잃은 태연은 택시 번호판의 숫자를 분간할 수 없었다. 태연의 낭패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태연의 시야를 더 흐리게 만드는 사이, 이미 택시는 장례식장 바깥으로 저만치 사라지고 있었다.


흡연구역. 치익. 딸깍. 라이터를 닫아 주머니에 넣은 박봉술이 길게 첫 모금을 빨아 들이켰다. 영정 앞, 앞구르기 쇼를 지켜보다 밖으로 나온 한산타임즈 박봉술 편집국장은 담뱃재를 털며 피식 웃었다. 전화로 돈을 뜯어내려고 한 것도 모자라서 장례식장 빈소에까지 들어와? 내가 널 얼마나 아끼고 챙겼는데... 결국, 세상엔 믿을 새끼가 하나도 없어... 저기 걸어오고 있는 저 새끼도 그렇고.


“나, 박 국장이랑 좀 할 얘기가 있으니까... 저 쪽에서 기다려.” “네. 시장님” 흡연구역까지 우산을 받쳐 들고 따라왔던 수행비서가 자리를 비키자, 현병규 시장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넌 비아그라가 남아도냐?” 현병규의 날카로운 힐난을 바로 해석하지 못한 박봉술이 힐끗 시장을 노려보며 대꾸했다. “갑자기 뭔 엉뚱한 소리야? 나 아직 문제없어. 외세의 힘 없이도 자주국방 하고 있다. 왜?” “비아그라 남으면 나나 좀 줘라. 응? 비아그라 가루라도 뿌린 거냐? 왜 일을 자꾸 커지게 만들어? 그냥 몇 대 패고 겁만 주겠다면서? 근데 결국 초상을 치르게 만들어?”


툭. 검지로 담뱃불을 튕겨낸 박봉술이 꽁초를 재떨이에 던졌다. 박봉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야. 현병규. 이 새끼야. 너 시장 자리 몇 년 앉아있다 보니까, 니 주제를 가끔 까먹나 본데... 나 박봉술이야. 박봉술이! 동창이라고, 시장이라고 적당히 맞춰 주니까 그새 잊었냐? 어디서 감히 혓바닥질이야? 이 새끼야!”


흠칫 당황하는 현병규 시장 코앞으로 박봉술이 다가섰다. 현병규의 커진 동공이 흔들리는 모양을 잠깐 노려보던 박봉술이 말을 이어갔다. “이게 다 니가 저지른 일이야! 내가 살생부 문건 조심하라고 그렇게나 신신당부했냐? 안했냐? 어디다 그걸 질질 흘리고 놔둬서, 응? 명훈이가 그걸 주워다가 노조에 넘길 때까지 상황 파악도 못한 이 찐따 새끼야! 니가 싸지른 똥 치우다가 지금 내손에 똥 다 묻었거든? 화가 나도 너보다는 내가 몇 천배는 더 났으니까... 아가리 닥치시고... 돈 준비해! 당장!”


“... 돈은... 또... 왜? 어디다 쓰게?”


“방금 안명훈이 문상 온 떡대 새끼. 저승이 그립나 보다. 그러니까 죽은 명훈이 찾아온 거겠지. 돈 준비해! 줄줄이 사탕으로 엮이기 시작하면 너까지 은팔찌야. 그리고 말야... 경고하는데, 나한테 말 싸가지 없게 하지 마. 뭐? 비아그라? 니 애첩년한테 구박 안 당하려면 너나 처먹어. 이 새끼야! 말 나온 김에, 너 두 집 살림하는 거, 그것도 알아서 좀 티 안 나게 조심해. 니가 친 사고 뒷수습하는 거, 이제 나도 넌더리가 나! 분명히 말했다. 돈 준비되면 연락해. 1억.”


박봉술이 현병규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서 현병규가 멀찍이서 대기 중인 수행비서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비서가 펼쳐 든 우산 아래 현병규가 빗줄기 속으로 멀어지는 모습을 보던 박봉술이 전화기를 꺼냈다.


“응. 살아있구나. 잘 지내냐?...... 너, 오랜만에 일 좀 해야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취중 진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