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월의 애벌레 – 제40화
한숨을 길게 내쉬고서 현병규가 멀찍이서 대기 중인 수행비서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비서가 펼쳐 든 우산 아래 현병규가 빗줄기 속으로 멀어지는 모습을 보던 박봉술이 전화기를 꺼냈다.
“응. 살아있구나. 잘 지내냐?...... 너, 오랜만에 일 좀 해야겠다.”
아버지 영정 앞으로 길게 줄을 선 문상객들에게 차례차례 인사를 하면서, 이지는 빈소 입구 쪽을 수시로 흘끔거렸다. 방금 전, 영정에 절을 올리려다 꽈당 넘어진 그 술 취한 뱀 문신 건달이 범인이라고? 나름 복싱을 오랫동안 했다지만, 태연 혼자서 그 덩치를 제압할 수 있을까? 그런데 태연은 화장실에서 뭘 들었기에 그 남자가 범인이라고 확신한 거지? 꼬리를 무는 궁금함이 초조함으로 바뀌려는 찰나, 태연이 빈소에 다시 들어오고 있었다. 빗물에 푹 젖은 태연의 힘없는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놓쳤나 보군... 얻어맞진 않은 것 같고...
이지가 태연을 유족 휴게실로 잡아끌었다. “어떻게 된 거야?” “택시 타고 튀었는데... 번호판을 확인 못했다. 여긴 주차 관제 시스템도 없고, 복도에 CCTV도 없다고 하고...” “화장실에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데?” 그때 은옥이 휴게실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지야, 조문객 기다리셔.”
“일단 녹음해 뒀어. 저번에 사건 당일에 녹음한 것과 같은 목소리야. 우선 경찰에 이걸 가져다주고...” “아냐! 주지 마!” “뭐? ... 왜?” “신고하지 마! 그거 녹음파일 두 개, 나한테 보내. 지금.”
유족 휴게실을 나서다 이지와 태연은, 마침 화장실에 다녀오던 장세연 의원과 문 앞에서 마주쳤다. 함께 방에서 나오는 두 사람을 본 세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유태연 씨가 고생이 많네요. 그래도 의회사무과 직원들 팀워크가 참 좋네.” 은근한 빈정거림을 던지고서 돌아서던 세연이 뭔가 생각난 듯, 태연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유태연 씨. 우리 집 거실에 가방 두고 갔던데... 오늘 아침에 나갈 때 깜빡했나 봐요? 이따 들러서 찾아가세요. 현관문 비밀번호 알죠?”
헉??!! 한 방 얻어맞은 표정의 태연이 황급히 이지를 돌아보았다. “아... 그... 나 가방 안 들고 다니는데... 아니야. 절대. 아...”
픽! 이지가 웃었다. “관심 없어. 젊은 남녀가 만나든 말든, 어디서 만나든, 만나서 무슨 짓을 하든, 그건 두 사람 자유지. 내 알 바 아니야. 그런 변명을 나한테 왜 하지?”
누군가와의 긴 통화를 마친 박봉술이 빈소로 돌아왔을 때, 장세연 의원은 현병규 시장과 같은 테이블에 있었다. 시종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같은 당 소속 두 정치인 옆에 앉으며 박봉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명훈이 가는 길, 적적하진 않구만. 작별 인사하러 많이들 왔어.”
“어머, 국장님.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술 다 식었잖아요. 자~ 벌주! 받으세요!” 장세연 의원의 애교는 잔뜩 찌푸린 채 굳어있던 박봉술의 얼굴을 펴는 다리미였다. “어? 우리 장 의원, 오늘 꽤 드시네? 예쁘고 똑똑한 데다 술까지 잘 마시고... 이런 최고 신붓감을 누가 데려가려나? 누군진 몰라도 그놈 참 부럽다. 부러워. 어디 내가 괜찮은 남자 소개 좀 해줄까?”
“국장님! 저 만나는 사람 있어요.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마침 떨어진 안주를 채우러 시장이 앉은 테이블에 온 이지는 못 들은 체, 머리 고기와 홍어무침 접시를 탁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런 이지의 눈매를 새삼 유심히 관찰하던 현병규 시장이 박봉술에게 말했다. “저 직원이 명훈이 딸이었다니... 명훈이한테 딸이 하나 있다는 건 알았어도, 한 번도 본 적은 없었는데...” “애비 노릇 제대로 못 했나 봐. 연락도 안 하고 의절하고 지냈다고 하더만... 자, 그럼 난 이만 먼저 일어날게요.” 박봉술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현병규 시장과 장세연 의원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들어가야지, 이제.” “저도 이제 그만 가 보려구요.”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빈소를 나서는 시장과 시의원과 지역신문 편집국장에게 이지는 정중히 인사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이지는 세 사람의 눈을 번갈아가며 똑바로 응시했다. 현병규 시장, 장세연 의원, 그리고 박봉술 한산타임즈 편집국장.
세 사람이 자리를 뜨자, 붐비던 빈소 안도 한산해졌다. 벌써 밤 10시를 넘긴 시각. 이지는 배가 고팠다. 밥이라는 것과 영원히 이별한 아버지의 영정을 무심히 쳐다보면서, 주린 배가 참 주책이구나 생각하면서, 이지는 소고기 뭇국에 밥을 한 덩이 말아 입에 넣었다. 켁켁... 급히 삼킨 탓일까. 사레가 들린 이지 앞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물 잔을 쥔 손이 다가왔다. 이지가 고개를 돌렸다. 기은석 의원이었다.
“아! 의원님! 언제 오셨어요? 아... 잠시만요. 상 차려드릴게요.” “아녜요. 저 먹고 왔어요. 그냥 앉아 계세요. 천천히 드세요.” 오늘 장례식장을 찾아온 수백 명의 조문객들 중에서, 이지는 그가 가장 반가웠다. 부드럽고 나직한 기은석의 목소리에서, 이지는 처음으로 따스한 위로를 느꼈다. 그런 이지의 얼굴에 번지는 환한 미소를 그만 봐버리고 만 태연은 조용히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냈다. 밝게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기은석과 안이지를 잠깐 지켜보던 태연은 간다는 말 없이 장례식장을 떠났다.
늦여름과 초가을 틈새로 거세던 굵은 빗줄기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밤공기의 저 끝에 구름 틈새로 슬며시 달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세연의 알몸을 안았던 6년 전의 밤, 그리고 바로 어젯밤과 똑같은 색깔의 달빛을 맞으며 태연은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삑! 차 문을 여는 순간, 전화기가 진동했다. 발신인 장세연 의원.
“어디야? 아직 장례식장이야? 유태연! 가방 찾으러 와야지?”
삐삐삐삐삑. 0218*. 태연의 생일 숫자에 세연 아파트의 현관문이 열렸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장세연 의원은 와인 잔을 들고 있었다. 위 아래 두 벌 속옷만 비치는 시스루 나이트가운 하나를 걸친 세연의 얼굴은 와인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