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cliche)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41화

by rainon 김승진

삐삐삐삐삑. 0218*. 태연의 생일 숫자에 세연 아파트의 현관문이 열렸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장세연 의원은 와인 잔을 들고 있었다. 위 아래 두 벌 속옷만 비치는 시스루 나이트가운 하나를 걸친 세연의 얼굴은 와인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일부터 행정사무감사 시작이야. 장세연 의원님아. 중요한 의사일정 앞두고서 술을 이리 많이 드셔도 되나?” 태연은 자기도 모르게 세연의 반 벗은 몸을 향하려는 시선을 애써 소파 팔걸이에 고정시켰다.


“행감 준비는 이미 다 해놓았으니 걱정 마세요. 유태연 주무관님아. 앉아. 한잔 해.”

“사양할게. 차 가져왔어.”

“자고 가.”


“싫어.”


세연의 곁을 피해 태연은 소파 아래 거실 바닥에 털썩 앉았다. 바로 눈앞에서 폭행범을 놓친 허탈함을 타고 피곤이 몰려왔다. 그 피곤함의 끝자락으로, 다정하게 서로를 향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이지와 기은석 의원의 모습이 매달려 밀려왔다. 태연은 화가 났다.


“너는... 왜 내가 그렇게 싫어? 이지 때문이야? 아직도 이지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거야? 설마 이지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야?”


대답 대신에 태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지에게 돌아가기는 힘들어졌다는 것을 태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태연은 이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바로 어젯밤, 세연의 벗은 몸을 안고 있으면서도 태연은 이지를 생각했다. 그런 자신이 기가 막히면서도 태연의 마음은 이지를 떨쳐내지 못했다. 태연은 더욱 화가 났다.


세연이 소파에서 내려와 태연 옆에 앉았다. 소파 앞 테이블에 와인 잔을 올려두고, 세연은 태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팔짱을 끼었다. 슬쩍 빼내려는 태연의 팔을 세연은 꼭 잡았다.


“클리셰...”

태연이 코웃음과 함께 나직이 내뱉었다.


“뭐라구?”

발음을 잘 알아듣지 못한 세연이 되물었다.


“클리셰. 꼭 자주 보는 영화 속 장면 같지 않아? 와인에 시스루 가운, 너무 진부하잖아. 좀 창의적일 수 없어?”

거실 천장의 별 모양 LED 등을 응시하면서 태연이 빈정거렸다.


“...... 사랑은 원래 진부한 거야. 그게 사랑이야. 변하지 않는 거. 창의성은 날개야...... 사랑은 날개가 없어야 해. 사랑이 창의적이면 날아가고 마는 거야...... 6년간 하루도 널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어. 널 만나려고 이 도시에 다시 왔어.”

속삭이는 세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마음과는 반대로 퉁명스러운 비수를 뱉고 말았다. “사랑? 섹스가 아니고? 넌 나한테 섹스를 바라는 거 아냐?”


세연의 팔을 뿌리치고 태연은 일어섰다. 아파트 현관문까지 여섯 걸음을 걷는 동안, 세연은 말이 없었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비명 같은 세연의 앙칼진 울음이 태연을 멈춰 세웠다.


“그래! 나 섹스를 바래! 나 섹스에 미친년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 너랑 섹스하고 싶어 미친년이다! 이렇게까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면... 니 맘이 편하니? 날 헤픈 여자로 만들면 이지한테서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 나쁜 새끼야! 나 너 좋아해. 많이 좋아해! 너만 사랑해! 사랑해서 너랑 자고 싶은 거라구!!!”


별 모양 LED 등 아래로, 거실에는 세연의 흐느낌만 흐르고 있었다. 태연의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몇 초가 지났다. 태연은 구두를 벗고 다시 여섯 걸음을 걸어서 세연에게 다가갔다. 거실 바닥에 웅크려 울고 있는 세연의 어깨를 왼팔로 감싸 안으며, 태연은 오른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그녀의 두 눈에 차례로 태연은 입술을 가져갔다. 기다렸다는 듯, 세연은 태연의 목을 거세게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침실로 향하는 동안에도 둘의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나이트가운이 세연의 몸에서 흘러내리자, 태연은 침대에 그녀를 눕혔다. 어제와 비슷한가 싶으면서도 조금은 다른 빛깔의 달빛이 침실 커튼을 비집고 세연의 벗은 몸을 비추었다. 바로 어젯밤에 보았던, 바로 그 장미꽃이 빗물 머금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바로 어젯밤...


커튼으로 들이치는 달빛 아래 세연의 봉긋한 가슴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손바닥 절반 크기의 빨간 장미 문신. 아... 장미... 태연의 가슴이 저며 왔다. 6년 전, 영화 동아리 <은잔>. 동아리방에서 이지와 세연과 태연, 셋이 함께 보았던 영화. 박찬욱 감독의 초기작 <3인조>.


영화 막바지. 경찰들이 포위한 창고 안에서 서로를 안은 남주인공과 여주인공. 여자와 나눈 처음이자 마지막 섹스를 지상의 마지막 추억으로 안고 죽어가는 남자. 둘의 처음이자 마지막 정사(情事) 장면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닉 케이브’와 ‘카일리 미노그’가 부른 <Where the wild roses grow>였다. 영화 못지않게 그 곡에 푹 빠져든 태연은 영화가 끝나고 그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찾아 틀었다.


뮤직비디오 속의 들장미를 보면서 태연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었다. “장미... 참 예쁘다. 화면이지만 이렇게 예쁜 장미는 처음 봐.” 영화도 뮤직비디오도 내내 시큰둥하게 보던 이지가 흘려들은 그 말을 귀담아듣고 반응한 것은 세연이었다. “나중에 말야. 니 연인이 저런 빨간 장미 문신을 몸에 새긴다면 어떨 것 같아?” “아! 난, 반가울 거 같아! 좋아!” “그래? 정말?”


세연 가슴에 핀 장미를, 태연의 혀와 입술이 정성껏 어루만졌다. 틈새. 살짝 열린 침실 창문 틈새로, 하루를 적시다 지쳐 잠든 빗방울의 잔향이 밀려 들어왔다. 틈새. 두 젊은 남녀의 거친 숨소리가 늦여름과 초가을의 틈새를 채우고 있었다. 틈새. 습기를 가득 머금은 밤공기의 저 끝 구름 틈새로 슬며시 달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틈새. 세연의 가슴에 핀 장미를 탐하던 태연의 입술이 아래를 향했다. 세연의 가장 은밀한 그 틈새에 태연의 혀끝이 수줍게 닿았다. 그렇게... 밤과 새벽을 잇는 틈새 속에서 태연과 세연은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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