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보드(backboard)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57화

by rainon 김승진

잠시 후. 죽(竹)실의 점심 식사도 거의 끝나갈 무렵, 세연이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어색한 공기를 깨뜨렸다.


“우리, 바다 보러 갈래요? 네 명이서 같이!”


[???!!!] 세 개가 동시에 <설하(雪夏)> 식당 죽(竹)실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태연이 다급히 세연을 제지하러 나섰다. “저... 의원님. 내일 월요일이고, 행감도 계속되는데...”


“행감 준비는 다 해놨어요. 근데, 얘는 참... 새삼스럽게, 의원님이 뭐냐? 실컷 세연아~ 우리 세연아~ 해 놓구선. 우리 넷, 다들 알잖아요? 서로들 무슨 관계인지. 다들 빠꼼이들인데... 뭐 숨길 것도 없잖아요. 둘둘 커플들이라는 거, 이 방 안에 있는 우리만 알고 있기로 해요! 굳이 바깥에는 소문 안 나게. 어때요?”


“그거 괜찮네요. 그럼 가요. 바다. 서해 쪽에 한...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지 않나? 마침 대하도 제철 시작이고, 가서 바다도 보고 새우나 먹고 올까요?”


태연과 기은석의 눈이 커지면서 동시에 이지를 향했다. 세연의 돌발 제안을 먼저 찬성하고 나선 것은 뜻밖에도 이지였다.


“제 차 한 대로 가시죠. 대하구이에 소주가 빠지면 심심하잖아요? 하하. 어차피 저는 술 잘 못 하니까...”


조수석에는 안이지를, 뒷좌석에는 장세연 의원과 유태연을 태운 기은석 의원의 차가 한산시 외곽을 빠져나와 서해안을 향해 속도를 냈다. 문득 장세연 의원이 앞에 앉은 이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왜요? 의원님.”


“안이지! 의회 밖에서는, 그냥 서로 친구로 대하자.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 그러시던가. 근데 우리가 친구였던가? 난 잘 기억이 안 나네. 아. 근데, 피곤하지는 않아? 아침에 태연이랑 둘이서 아주 격렬한 운동을 하는 것 같던데?”


태연의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몇 시간 전, 세연과의 정사(情事). 그리고, 일부러 수화기 건너 이지가 들으라며 세연이 연기했던 신음소리와 교성을 기은석에게까지 들키는 기분이었다.


“운동? 장 의원님, 무슨 운동 하세요? 장 의원님도 혹시 복싱하시나요? 맞다. 태연 씨, 요새 체육관에 잘 안 나오시는 것 같은데, 태연 씨 혹시 체육관 옮기셨어요?”


“아뇨. 요새 좀 바빠서... 해야죠, 운동.” 차라리 바늘방석에 앉는 게 편하겠구나, 생각하며 태연은 차창을 열었다. 부디 가을바람이 이 엉망진창으로 어색한 차 안의 공기를 쓸어내 주길 바라는 태연의 속내를 모르는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세연은 괜히 깔깔거리며 즐거워 보였다. “어머! 기 의원님도 권투 하시나 봐요? 언제, 우리 태연이랑 시합 한 번 해요! 왠지 태연이가 이길 거 같은데... 태연이 학교 다닐 때도 싸움 잘했어요. 얘가 순해서 누굴 먼저 때린 적은 없지만.”


한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태안 앞바다는 가을과 새우를 느끼러 온 인파로 북적였다. 저 혼자 신이 난 세연이 앞장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바닷가 바로 앞 한 노점으로 쓱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대하 버터구이, 그리고 대하탕. 괜찮죠? 사장님~ 여기 주문이요!”


뱃속의 갈비찜이 당황하겠다. 채 소화도 되기 전에 식도를 타고 쏟아지는 새우들을 보고 소고기들이 놀라지 않을까? 평생 소들은 새우를 만날 일이 없을 텐데... 이렇게들 만나나? 내내 불편한 마음의 태연은 이런 엉뚱한 생각들을 하며 시간이 빨리 가기만 바라고 있었다.


새우 육수가 우러나는 소리가 리드미컬했다. 보글보글 퍼지는 새우 향을 안주로 소주 석 잔과 사이다 한 잔이 부딪쳤다. 캬! 잔을 내려놓으며 세연이 이지에게 말을 걸었다.


“아버님... 보내드리느라 고생 많았어. 그런데... 아직도 범인을 못 잡았다는 게... 참...”


몇 시간 전, 아침. 태연의 핸드폰으로 들었던 폭행범 목소리도, 거기에서 튀어나온 ‘박봉술’ 세 글자도 짐짓 모르는 양, 세연이 이지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못 잡으면 할 수 없는 거지. 이제 와서 잡는다고 죽은 아빠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교통사고 당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게 속 편해.”


“그래... 뭐... 꼭 잡아서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게 당연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이지 네가 그것 때문에 더 고통스럽거나 힘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고맙네... 걱정을 다 해 주시고.” 이지는 병을 들어 세연의 잔을 채웠다.


새우는 맛이 훌륭했다. 짠 내 나는 저 바닷바람이 소화제인가 보다. 점심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네 남녀는 소주를 곁들여 제철 새우 맛을 제대로 즐겼다. “소화시켜야지~ 태연! 우리 오늘 좀 유치해져 볼까? 나~ 잡아봐라!” 취기가 오른 세연은 더할 나위 없이 들뜨고 즐거워만 보였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오버액션일까? 태연은 세연을 따라 파도가 육지를 어루만지는 야한 철썩거림을 귀로 담으며 모래톱으로 나갔다.


자리에 둘만 남게 되자, 이지가 입을 열었다. “의원님.”


“네. 이지 씨. 근데 이제는... 그냥 은석이라고 이름 불러주면 안 되나요?”


“아... 좀... 더 시간이 지나고 편해지면, 그때...”


“네. 이지 씨 편한 대로... 편하게... 아. 근데, 좀 전에 장 의원한테 한 얘기... 범인 잡는 것, 별 미련 없다는 그 말... 이지 씨 마음에 없는 얘기죠? 그렇죠?”


“네. 굳이 제 생각을, 아무한테나 다 얘기할 필요는, 이유는 없으니까...”


바로 어젯밤. 바 <쁘렘>에서 이지와 나눈 대화를 기은석이 떠올렸다.


“저는 범인을 알아요.” “??? 네? 아니 그럼 당장 신고를 해야...”

“아뇨. 제게 생각이 있어요. 제 방식대로 하려구요. 그런데 의원님.”

“제가 언젠가... 곧... 의원님께 좀 도움을 청해도 괜찮을까요? 절... 도와주시겠어요?”


새우만 파는 한 철 장사 노점들이 즐비한 바닷가 저편으로,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주황색 공 하나로 즐거운 땀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기은석이 이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농구 좋아하세요? 이지 씨?” “글쎄요... 별로.” “하긴, 농구는 남자들이 많이 좋아하긴 하죠.”


“그 나이 때 아이들이, 뭐, 거의 그렇듯이... 저도 학교 다닐 때 농구에 미쳤었죠. 근데 말이죠. 다른 공놀이랑은 좀 다른 특징이랄까... 농구에는 그런 게 있어요.”


“그게 뭔데요?” 하는 표정으로 이지가 은석을 바라보았다.


“골에 공을 넣어야 이기는 종목 중에서, 어쩌면... 농구가... 자기 자신만의 힘이나 실력만으로는 점수를 올릴 수 없는? 그런 특색이 강하죠. 골대에 꽂히는 공의 절반 이상은 골망으로 직행하지 않아요. 골망 뒤에 백보드를 맞추고 들어가지요. 만약... 농구대에 백보드가 없다면, 그 어떤 프로선수라 해도 골을 넣기가 쉽지 않을걸요. 슈팅 성공률은 절반 이하로 떨어지겠죠.”


사이다 잔을 들어 목을 축이다가, 은석은 좀 전, 식당 <설하(雪夏)>에서 엿들은 현병규 시장 일행의 대화를 문득 떠올렸다. 박봉술... 한산시 곳곳에 끈끈이 거미줄을 쳐놓은 그놈이 왠지 이 사건과 상관이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은석의 뇌리를 살짝 스쳤다.


“이지 씨, 혼자만의 힘으로 공을 골망에 넣지 못한다면... 제가 백보드가 되어 드리죠. 이지 씨는 그냥 세게 던지기만 하세요. 제가 그 공 받아내고 튕겨서 골인시켜 드릴게요.”


은석이 손을 내밀었다. 이지가 은석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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