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장 의원님, 향수 뭐 뿌리나?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61화

by rainon 김승진

기표 부스의 커튼 안. 기표 용구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짧은 심호흡. 장세연 의원이 기표 용구를 투표용지에 찍어 눌렀다.


시장 출석 및 답변 요구의 건. <찬성>


검표를 마친 6장 투표용지를 모아서 위원장석으로 가져가는 동안, 태연은 태연하고자 애를 썼다. 자기도 모르게 세연 쪽을 돌아볼 뻔한 충동을 태연은 참았다. 설마 세연이가 반란표를? 아닌가? 뭐지?


웬 떡인가 싶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짐짓 찌푸린 얼굴로 평화당 소속 최석현 행감 특위 위원장이 표결 결과를 발표했다. “표결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찬성 4표, 반대 2표. 한산시장 현병규에 대한 행감 특위 출석 및 답변 요구의 건은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타 다다닥. 속기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방청석 맨 앞줄에 앉은 우리신문 정재호 국장은 안이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보통 처자는 아니다. 부전여전인가... 안명훈 씨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항상 침착한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기은석이 시장을 불러내다니... 기은석 의원도 뭘 알고 있는 걸까? 근데 반란표가 누굴까? 윤기호나 박병달은 현병규와 50년 지기, 불알친구들이다. 장세연 의원, 저 젊은 친구가 현병규한테 엿을 먹인 건가? 어쨌거나, 생각지도 않았던 소득이다. 내일이면 기은석과 현병규가 한바탕 크게 싸울 테고, 기사는 내일 행감 일정 끝나는 대로 날리자.


꼬리를 무는 생각과 계획이 가득 찬 정재호 기자의 머리통을 뒤에서 노려보며, 박봉술은 잠깐 엉뚱한 상상에 빠졌다. 내 눈깔에서 레이저 광선이라도 나갈 수 있다면, 저 개자식의 대갈통을 쪼개 버릴 수만 있다면, 내 남은 수명의 절반을 악마한테 기꺼이 주고 싶다. 명훈이 장례식에서 발인 전날에 정재호 저 새끼는 명훈이 딸년과 대체 무슨 수작을 꾸민 걸까...... 뭐 그래도 상관없다. 명훈이 대갈통을 박살 낸 정태 녀석이 흔적 없이 사라진 마당에, 뭘 어쩌겠어? 최악의 경우라도 블랙리스트 건이 담긴 녹취를 안이지라는 저 계집애가 깐다고 해도... 그럼 뭐, 병규 놈한테 뒤집어씌우면 그만... 봉술아, 봉술아. 신경과민이다. 아무것도 아닐 거야.


“이상, 오늘의 감사 일정을 모두 마쳤으므로 산회를 선포합니다.”


본회의장 정리를 마친 이지는 회의장 창문과 출입문들을 모두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2층 본회의장 앞 복도 한구석의 응접 테이블에는 윤기호, 박병달, 장세연. 세 명 의원과 박봉술이 앉아 있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1층을 향해 계단 끝까지 내려간 이지가 사무실로 가던 발을 멈췄다. 숨을 죽이고서 가만가만 2층으로 난 계단을 천천히 되밟아 올라가는 동안, 발바닥의 모든 땀구멍이 열려 양말을 적시는 느낌이었다.


“이거, 뭐... 거짓말 탐지기라도 어디서 빌려 와야 하나? 누구냐고 물어봐도 대답 안 하겠지만, 그래도 난 물어야겠어. 도대체 누구냐?” 박봉술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난 알아. 이 두 사람 중 하나야. 난 반대표를 찍었으니까.” 윤기호 의원의 미간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너 바보지? 네가 나라면 네 말을 믿을 수 있을 거 같아? ...... 어쨌든, 범인은 너희 두 놈 중 하나야.”


박병달 의원이 발끈했다. “뭐? 야!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 세 명을 다 의심해야지!!!”


“우리 장 의원은 그럴 사람 아니야. 내 잘 알지. 안 그런가? 장 의원?”


박봉술의 핥는 듯한 눈길을 피하지 않고 세연은 미소를 지었다.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아무에게도, 어디에도 없잖아요. 진실을 찾을 수 있는 진실게임이란 없어요. 제가 그랬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판인 걸 어떡하나요. 내일 행감장에서 시장님을 어떻게 엄호할지를 생각하는 게 더 건설적이지 않을까요?”


“...... 그래, 그 말이 맞네...... 그나저나 우리 장 의원은 항상 향기가 매혹적이라니까. 아주 그냥, 잠깐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워요. 천당에 온 느낌이야. 우리 장 의원님, 향수 뭐 뿌리나?”


“왜요? 하나 사 주시게요? 하하. 제가 쓰는 건 살짝 비싼 건데?” 까르르 터지는 세연의 웃음을 슬쩍 곁눈질하는 박봉술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스쳤다. 엿듣기를 멈추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 이지의 입가에도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밤 11시. 한산시의회 청사 외벽을 밝히던 전광판이 꺼지자, 운전석의 박봉술이 조수석에 앉은 남자를 흔들어 깨웠다. 막 단잠에 빠지려다 멱살을 잡힌 남자가 짜증을 냈다. “아니, 대체 왜? 이 시간에 나를 꼭 불러야 할 일이야?”


“조용히 따라오기나 해. 정 그렇게 계속 쳐자고 싶으면 니 검지 손꾸락만 잘라서 나 주던가.”


“에이, 씨...” 쌍욕을 입 안으로 웅얼거리며 무소속 박병달 의원이 조수석 문을 열고 내렸다. 의회 청사 중앙현관에 붙어 있는 무인경비 시스템 기기. 손바닥만 한 액정화면은 파란 바탕에 <경비 중> 글씨가 선명했다.


“문 열어!” 잠깐 주위를 살피던 박병달 의원이 무인경비 시스템 단말기에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멜로디와 함께, 청사 경비가 해제되었다.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은 곧장 1층 의회사무과 사무실 문 앞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번호 키. “나, 이 번호는 모르는데?” 당황한 박병달 의원 대신 박봉술이 삑삑 삑삑! 정답을 누르자 자동문이 열렸다. “너는 재선의원 씩이나 되면서, 어찌 그리 눈썰미가 꽝이냐? 오다가다 슬쩍 한 번만 훔쳐보면 되는 걸.”


박봉술은 창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조명 하나만 스위치를 올렸다. 사무실 벽면을 가득 채운 캐비닛에 적힌 관리자 성명을 빠른 속도로 훑어보던 박봉술이 반가운 탄성을 질렀다. “유태연... 유태연... 유태연... 유태연! 여깄다!” 박봉술이 거침없이 캐비닛을 열었다. 잠겨 있지 않은 캐비닛 안에는 몇 시간 전 본회의장에서 현병규 시장을 행감장으로 불러낸 그 투표용지들이 담긴 투표함이 그대로 있었다. 주머니에서 1회용 비닐장갑을 꺼내 손에 끼고, 박봉술은 투표함을 조심스럽게 들어 가까운 책상으로 옮기고는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찬성> 란에 기표된 4장의 투표용지를 추려냈다. 한 장, 한 장, 아주 천천히 박봉술은 투표용지를 코에 가져다 댔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박봉술의 행동을 관찰하던 박병달 의원이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너 지금 뭐하냐??? 아이고야... 친구야. 어디서 추리소설책은 많이도 봤나 보네?”


박봉술의 얼굴은 심각했다. “방해되니까 조용히 해!!!” 살기마저 느껴지는 짧은 경고에 박병달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번, 투표용지 4장의 냄새를 확인하던 박봉술이 나지막하게 외쳤다.


“찾았다! 아니, 잡았다! 이 깜찍한 꼬마 계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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