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월의 애벌레 – 제60화
“저기... 잠시만.” 말없이 듣고만 있던 기은석 의원이 손을 들고 입을 열자, 모두가 조용해졌다. 여섯 명 시의원의 눈이 일제히 기은석을 향했다.
“현병규 시장 직접 출석 답변. 정식으로 요구합니다.”
“허허. 이봐요. 기은석 의원! 장사에도 상도의라는 게 있는 거요! 시장 출석시켜서 면박 좀 준다고 당신 주가가 올라갈 거라 기대하시나 본데, 좀 적당히 해요! 내일모레 퇴직할 자치행정과장 괴롭혔으면 됐지! 어디서 어림도 없는 소리를!” 장세연 의원과 함께 시장과 같은 당인 윤기호 의원이 버럭 화를 냈다.
그에 질세라 평화당 의원들이 되받아쳤다. “뭐가 어림도 없어요? 나도 찬성입니다. 현병규 시장 불러서 직접 답을 들어봅시다!” “아니, 진짜로 떳떳하다면, 못 나올 이유가 없잖아? 시장 오라고 해!”
의장실 안을 채운 의원들의 고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가만히 양쪽 편의 옥신각신을 듣고 있던 장세연 의원이 얼른 머릿속으로 머릿수를 세보았다. 어차피 의장은 행감 특위 위원이 아니니까, 이번 건에 표결권이 없다. 그렇다면... 특위 위원은 6명. 평화당 소속이 3명, 새정치당 2명, 무소속인 저 할배도 친 현병규 성향. 3대 3. 가부동수(可否同數)는 부결. 표결 가도 문제없다. 어차피 부결된다.
한 발짝 늦게, 같은 계산을 같은 당 윤기호 의원도 마친 것 같았다. 윤기호가 옆자리, 현병규와 친한 무소속 박병달 의원에게 살짝 귀엣말을 건넸다. 박병달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표결로 정합시다. 당연히, 결과에는 깨끗하게 승복하는 걸로!”
“좋습니다. 다만... 위원장님. 표결은 거수 표결 말고, 무기명으로 했으면 합니다.”
기은석 의원의 무기명 투표 제안에 장세연과 윤기호, 박병달, 친 현병규 파 세 명 의원이 잠시 당황했다. “무기명?”
“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깔끔하게 그에 따르되, 단, 무기명 비밀투표로.”
윤기호 의원이 장세연, 박병달 두 의원과 재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머뭇거리던 새정치당 윤기호 의원이 말했다. “콜! 무기명 투표로 합시다. 단, 부결되면 시장 출석 요구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거요! 블랙리스트 건도 더 언급 안 하는 걸로! 다른 말 하기 없어요!”
최석현 행감 특위 위원장이 인터폰 수화기를 들고, 바깥에 대기 중인 의장실 비서를 찾았다. “지금 의장실로 의사팀장 들어오라고 하세요.”
지시를 받고 의장실에서 나온 의사팀장 지선아는 상기된 얼굴이었다. 본회의장 바깥 복도에서 종이컵에 커피믹스를 뜯어 넣던 유태연은 지선아 팀장의 표정을 보고 직감했다. 오늘 점심은 다 먹었구나...
“태연 씨, 좀 서둘러야겠어. 우선... 의사일정 변경안 만들고 시나리오 다 고쳐야 해. 바로 정회했다가, 오후 2시에 감사 속개하자마자, 현병규 시장님 출석 요구안 표결 부칠 거야. 무기명 비밀투표로 진행할 거니까, 창고에서 기표 부스랑 도구들 꺼내서 세팅하고, 투표용지도 만들고... 시간 없으니까, 나랑 같이 어서 준비하자.”
윤기호, 장세연, 박병달 세 의원이 먼저 나가자, 의장실에는 평화당 소속 4명 의원만 남게 되었다. 뭔가 찜찜한 표정의 의장이 말을 꺼냈다. “이거... 3대 3. 가부동수 부결 날 텐데, 그러면 현병규를 증언대에 세우지도 못하고,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드는 거 아닌가 몰라?”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시장 출석 요구안이 부결되더라도, 이슈화에는 성공하는 거니까. 당장 지역 신문들에서 크게들 보도할 거고, 블랙리스트 건이 다시 부각되는 것만으로도, 우린 성과를 거두는 거야. 괜찮아. 나쁘지 않아. 잘했어! 기 의원. 그런데... 앞으로는 말야. 먼저 당 차원에서 협의를 하고 나서 내지르도록 해. 결과적으로 현 시장 출석 요구, 나쁘지 않은 한 수이긴 했는데... 그렇게 돌발적으로 하는 건 좀... 여기 의장이나 나나 선배들 체면이라는 게 있는 거야.” 행감 특위 위원장인 부의장 최석현이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기은석 의원을 가볍게 타박했다.
기은석 의원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앞으로는 명심하겠습니다.”
“의석을 정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의사일정 변경의 안...... 다음, 기은석 위원으로부터, 시장 현병규 특위 출석 및 답변 요구 건이 발의되었는 바, 잠시 후 오후 2시에 이 안건에 대한 표결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정회를 선포합니다.”
회의장을 나오던 박봉술은 문 앞에서 우리신문 정재호 국장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정재호가 건네는 깍듯한 인사를 외면하고 박봉술은 곧장 시장실로 향했다.
오후 2시. 현병규 시장을 행감장에 불러낼 것인지 여부를 정하는 무기명 투표의 마지막 차례는 장세연 의원이었다. 투표용지 배부를 맡은 주무관 유태연 앞에 선 세연은 잠깐 태연과 눈이 마주쳤다. 태연의 눈빛이 뭔가를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태연으로부터 투표용지를 받아 기표 부스로 걸어가다, 세연은 속기석의 이지와도 눈이 마주쳤다. 이지의 눈동자는 더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세연의 머릿속을 희미하게 떠다니던 기억이 살아났다. 선거 3일 전, 한산타임즈 사무실. 박봉술에게 지지 청탁과 함께 세연이 돈봉투를 건네던 그때, 박봉술에게 걸려왔던 전화 한 통화.
“여보세요. 응. 그래... 괜찮아 말해...... 뭐라고??? 노조가? 블랙리스트??? 야! 현병규! 그 정도는 시장인 네놈이 알아서 막았어야 하는 것 아냐??? 임마!”
선거 직전, 너무나 정신이 없었던 탓일까... 블랙리스트가 현병규와 박봉술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두 귀로 똑똑히 들었던 그 상황이 이제야 생생히 떠올랐다. 그리고 어제 태연의 핸드폰 속 녹취 음성이 그에 겹쳐졌다. 이지 아버지를 두들겨 패서 죽인 배후가 박봉술이라는 사실. 두 사건 사이에 뭔가 관련이 있다! 하나, 둘, 셋... 기표 부스로 걸어가는 장세연의 3초는 길었다.
기표 부스의 커튼 안. 기표 용구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짧은 심호흡. 장세연 의원이 기표 용구를 투표용지에 찍어 눌렀다.
시장 출석 및 답변 요구의 건. <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