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단봉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63화

by rainon 김승진

“오늘 넌 아무것도 못 본 거야. 혓바닥 간수 잘해라.”

“... 어떻게 할 건데?......”

“부처님 손바닥에 오줌을 쌌으니 벌을 좀 받아야겠지? 지가 손오공인 줄로 착각하는 발칙한 꼬마 의원님, 내 방식대로 처리한다.”


바로 그 시각, 부처님(?) 손바닥에 실례를 한 손오공(?)의 손바닥은 태연의 몸을 쥐고 있었다. “작아진다... 신기해.” 정사(情事)의 절정 끝을 잡고 밀려오는 노곤함에 취한 태연은 문득 느꼈다. 먼저 든 몸정에 올라탄 마음정이 점점 깊어지면서, 이지에 대한 미련도, 그리움도 차츰 엷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옅어지는 미련 끝자락에 매달려 있던 죄책감도 가벼워지는 듯했다. 지난 일요일, 바닷가. 좀체 잘 웃지 않는 이지가 기은석 의원에게 보인 환한 미소가 생각나자, 태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그냥 같이 살면 안 될까?”

“지역신문 1면에 나오고 싶어?”

“우리가 무슨 죄 지었니? 정 남들 눈치 보이면, 먼저 약혼부터 하면 되잖아.”

“......”

“나, 너 닮은 아이 갖고 싶어.”


대답 대신 태연은 세연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이 생각났다.


“근데... 너...”

“응?”

“아까, 시장 출석 요구 안건, 왜...? 찬성한 거야? 당론과 다르게 말야.”

“...... 어떻게 알았어?”

“왠지 너일 것 같았어. 근데... 무기명 비밀투표였다지만, 니가 의심을 받을 수도 있잖아.”

“그걸 어떻게 알겠냐? 국과수에 지문 감식이라도 의뢰하겠어?”

세연이 키득거렸다. “너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몰라.”


“모르겠어. 그 순간, 내가 왜 그랬는지... 그냥 순간적으로 충동적으로 그랬어. 당연히 우리 당 시장이니까, 출석 요구에 반대를 해야 했고, 또 그러려고 했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투표용지 받을 때, 니 눈을 보고... 그리고 투표하기 직전에 이지 눈을 보고... 내가 뭐에 홀렸던 건지...”


“그 공무원 살생부, 블랙리스트라는 거. 그거 실제로 있어.”

“... 그게 정말이야?

“박봉술이 자기 입으로 내 앞에서 그랬었어. 선거 3일 전에, 기사 터지고 나서 박봉술이 그걸로 현병규 시장이랑 통화를 하더라구.”


“사실 시청 직원들도 거의 다, 일부 시장 똘마니들 빼곤, 그놈의 블랙리스트라는 거, 시장은 만들고도 남을 인간이라고 생각들 하고 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현병규나 박봉술이나... 둘 다 뱀 같은 인간들이야.”

“그런데 넌, 뱀들이랑 왜 친하게 지내니? 현병규나 박봉술 앞에선, 넌 아주 그냥... 너 시의원 대신 배우를 했어야 해.”


대답할 말을 바로 찾지 못하다가, 세연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괜히 멋쩍어진 세연이 어깨를 감은 태연의 손을 쳐냈다.


“그게... 정치야. 뱀 같은 놈들 앞에서 웃어야 하는 거. 속에서는 소름이 돋아도, 천불이 나도, 그래도 웃고 아부해야지 살아남는 게 이 바닥이야. 그런데... 그러면서 익숙해지고, 당연해지고, 결국 나도 그런 뱀들 앞에서 웃다가 같이 뱀이 되어갈지도 모르겠지.”

“그러게... 그런 정치를 왜 넌 시작한 거야? 그것도 일찍부터. 난 누가 돈 주면서 하라고 해도 싫을 거 같은데.”


“고등학생 때 내 모습 기억나? 말도 잘못하고, 늘 기죽어 있고, 널 먼저 알고 먼저 좋아했는데도 바보같이 이지한테 널 빼앗기고, 이지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그래... 6년 만에 다시 본 너는 완전 다른 사람이더라. 성형도 성공했고... 아얏!”

태연의 손등을 세게 꼬집은 세연이 말을 이어갔다.


“그런 내가 싫었어. 어느 순간, 결심했지. 정반대의 사람이 되어보자. 들어간 학과도 정치외교학과였고, 선배들 따라서 새정치당 인턴 직원 하다가... 뭐 어찌어찌 이렇게 굴러왔네. 어쨌거나 그 덕분에, 널 다시 만난 거고. 그래서 난 참 행복하고.”


“그런데 말야, 이지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도록 시킨 놈이 박봉술인데... 살인범인데... 여전히 떵떵거리며 활보하고 다니고... 오늘도 회의장에 나타나서 거들먹거리고... 난,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정말.”

“이지는 왜 신고를 하지 마라는 거야? 지가 뭘 어쩌겠다고?”

“모르겠어. 나도. 근데 이지 나름대로 뭔가 생각이 있는 것 같아.”


“왠지... 그냥 이건 내 생각인데...” 세연이 말꼬리를 흐렸다.

“응?”

“혹시... 그 블랙리스트랑, 이지 아빠 돌아가신 거랑... 상관이 있지 않을까.”


바로 그 둘의 상관관계를 이지에게만 알려준 가가멜, 우리신문 정재호 국장이 다음 날 배포할 기사 초안 작성을 마치고 ALT+S 키를 눌렀다. 벽시계의 시침이 숫자 12에 바짝 다가가 있었다. 정재호가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막 걸치려는 그때, 누군가 신문사 현관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정재호 기자는 책상 맨 아래 서랍 속에 든 삼단봉을 꺼냈다. 이 시간에 신문사를 찾아오는 인간은 선량한 의도로 오는 게 아니지. 10년 전, 정재호는 재개발 사업에 조폭들이 발을 담그고 있다는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그 대가로 괴한들에게서 야구방망이 습격을 당해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이후로, 정재호는 늘 삼단봉을 가지고 다녔다. 결국 잡지 못한 그 괴한들이 박봉술의 부하들일 거라고, 정재호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었다.


“똑똑똑” 정재호는 심호흡을 하고 현관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삼단봉을 펼쳤다. 삼단봉이 펴지는 소리를 인기척으로 알아들은 걸까. 노크의 주인공이 천천히 신문사 현관문을 열었다.


“누구야?” 삼단봉을 쥔 정재호의 오른팔에 힘이 들어갔다. 문이 열리고 한밤중의 방문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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