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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May 26. 2022

혹시 혈압약 드시나요?

[소설] 가브리엘의 오보에 - 11화

“누구시죠?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박 팀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 보세요. 무슨 일이시길래.”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저. 악기를 배우고 싶어서요.”


“네?”


“저. 오보에를 좀 배울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피아노 여선생이 당황한 것 같았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는,


“여긴 피아노 학원이에요. 그리고... 성인 레슨은 하지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내심,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박 팀장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다섯 걸음이나 걸었을까. 그를 피아노 여선생이 멈춰 세웠다. “저... 저기요.”


“네?” 걸음을 멈추고, 박 팀장은 고개를 돌렸다.


“혹시 혈압약 드시나요?”


이건 또 뭔 소리인가... 박 팀장은 귀를 의심했다.


“아뇨. 안 먹는데...”


“고혈압 없으시죠?”


“네. 혈압은 정상입니다.”


“들어오세요.”


학원 1층 사무실은 작고 아늑하고 아기자기했다. 주 고객인 아이들이 좋아라 할 만한 인테리어 장식은 단순하면서도 단정했다. 소파에 앉은 박 팀장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내가 판 함정에 내가 빠진 꼴. 순간 위기를 면하려 뱉은 거짓말 때문에 일이 커지고 있구나.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학원 안 여기저기에 눈길을 던지며 훔치듯 구경하는 박 팀장 앞으로 차 한 잔이 놓였다.


“캐모마일 티. 괜찮으시죠? 밤이라, 카페인 없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아. 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한 모금 음미하고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박 팀장은 피아노 여선생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바로 앞 가까이에서 본 여선생은, 낮에 황포돛배에서 봤을 때보다도 훨씬 미인이었다. 9살에 죽은 딸이 있었던 걸로 봐서는 빨라야 서른 초반일 텐데... 십 년은 더 어려 보이는 앳된 얼굴에는, 그러나 마음 깊이에서 샘솟는 듯한 슬픈 그림자가 옅게 스며 있었다. 새카만 머리칼 탓인지, 얼굴은 더없이 희고 깨끗했다. 깊고 야무진 눈동자는 머리카락 색처럼 검으면서도 맑았다.


“오보에를... 배우고 싶으신가요?”


지금이라도, 뱉었던 말을 주워 담고 어서 여기서 나가야지. 박 팀장의 머릿속은 이때다 싶었지만,


“네. 소리 색이 너무 예뻐서요.”

??? 박원석, 너 지금 뭐라고 했니? 그의 입은 생각을 배신했다.


“소리 색? 소리에도 색이 있다고 믿으시는가요?”


“소리에는... 색도 있지만, 향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좀 엉뚱한 소리죠?”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며, 박 팀장은 아까 낮에, 하늘섬 공동묘지에 퍼지던 피아노 여선생 오보에 소리의 향기를 다시 떠올렸다. 그제야 박 팀장은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도 먼저, 생각과는 다르게, 오보에를 배우고 싶다고 자신의 입이 왜 그랬는지를 알았다. 그는 낮에 만났던 그 오보에 향기에 취해 있었던 거다.


소리에서 향기가 난다는 박 팀장의 말에 여선생의 눈이 반짝 빛났다. 왠지 그 말이 여선생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녀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스쳤다.


“오보에는... 아주 어려운 악기예요. 흔히 사람들이 피리라고 부르는 목관악기 중에서도 제일 까다롭거든요. 힘이 많이 드는 악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고혈압 있는지 물어본 거예요. 혈압 높으면 절대로 연주해서는 안 되거든요.”


“그렇군요.” 혈압 때문에 연주할 수 없는 악기도 세상에 있구나. 박 팀장은 신기했다.


“오보에는 갖고 계신 가요?”

“아뇨. 없습니다. 아직.”

“좀 많이 비싸요... 전문가용은 천만 원이 넘고, 보통 사백, 오백. 초보자용도 백만 원 넘는데...”


박 팀장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자신의 카드 한도액을 떠올렸다. 할부로 사면 되겠지 뭐... 생각하는 박 팀장에게 여선생이 은혜를 베풀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분으로 갖고 있는 오보에를 빌려 드릴게요. 낡긴 했지만, 연습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이 말만큼은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저, 그런데 레슨비는 얼마나, 언제 드리면 될까요?”


아주 아주 짧은 시간, 여선생의 얼굴에, 슬픔과 서러움이 뒤섞인 뭔가가 투명하게 지나갔다.


“나중에... 후불로 주세요.”

“네? 후불... 이라뇨?”

“나중에 주세요. 그러셔도 괜찮아요. 나중에, 언젠가, 레슨이 끝날 때, 그때... 그때 주세요.”


무언가에 취한 듯, 홀린 듯, 피아노 학원을 나서 집으로 향하는 박 팀장은 멍한 기분에 붙잡혀 있었다. 그래서,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싼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밟으며 미행하는 것도, 평소라면 눈치챘을 박 팀장도, 그때는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원룸 현관 도어록 버튼에 아들 생일을 누르고, 박 팀장은 집에 들어섰다. 아까 대낮, 죽은 선장 집 앞에서, 선장 아들에게 기습을 당하며 계단을 굴렀을 때, 계단참에 나뒹굴며 생긴 무릎과 어깨의 타박상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유도로 단련된 몸이었지만, 계단 모서리의 충격을 피해낼 재간까지는 없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어깨와 다리에 파스를 붙이고, 캔맥주 세 캔을 찌그러뜨리자 잠이 밀려왔다. 시골 경찰서로 내려온 후, 네 번째로 맞았던 긴 하루가 닫히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스르르... 소파에 앉은 채 잠에 빠지는 박 팀장의 입에서 나직이, 오늘도, 아들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준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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