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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이 Jun 21. 2024

 영이샘의 임정답사기-엄항섭,조성환 발차취를 따라 3

6 월1일 상하이(2)황포구 와이탄 야경과 황포탄의거의 현장

상하이 야경을 보기 위해 와이탄으로 이동했다. 유람선에 탑승해서 야경을 본다고 하니 더 기대가 된다. ‘걸어서 세계속으로’에 나오는 그 장면을 나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늦은 시간임에도 유람선에는 관광객들이 가득하다. 모두 다 사진찍기에 정신없다. 나도 생전 처음 보는 화려한 야경에 넋이 나갈 지경이다. 상하이 야경이 유명하다고 하더니 그 이름값을 하는거 같다. 양쪽 강변으로 각각의 특색있는 조명을 켠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구경거리가 넘쳐난다.  

상하이 랜드마크 동방명주가 보이는 와이탄 야경


한참을 구경하고 사진찍는데 저쪽에서 교수님이 이곳 와이탄 강변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곳인지 설명해주신다. 그러고 보니 야경만 즐기러 온 것이 아니다. 이곳 상하이는 곳곳이 임시정부 활동지인 것이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말씀해주시는 장소를 확인해 본다. 

멀리 보이는 빨간 다리 밑에 각국 공사관이 있고 그쪽으로 여러 포구들을 통해 독립운동 인사들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상하이 와이탄에 있는 포구는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들어올때 거쳐온 곳이다.

특히 와이탄 강변의 세관 건물은 황포탄 의거가 있던 곳이라고 알려주신다. 

화려한 야경에 묻혀 있는 우리 역사의 아픈 현장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상하이는 윤봉길 의거로만 알고 있었는데 내가 미처 몰랐던 황포탄 의거에 대해 알게 되어 뜻깊은 시간이었다. 인터넷과 책을 통해 의거의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확인해본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상하이 한복판에서 대담하게 시도한 의거였다. 독립운동의 역사는 무수한 실패와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간 것임을 새삼 느낀다. 

황포탄 의거가 있었다는 당시 상하이 세관자리 건물

** 황포탄 의거 ** 

1922년 3월 28일 일본군 육군 대장 다나카가 필리핀 마닐라로부터 귀국하는 도중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의열단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은 다나카를 사살할 것을 결정하고 치밀한 거사 계획을 세웠다. 

거사 당일 다나카가 도착하여 하선하면서 마중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 오성륜이 권총을 발사하였다. 그러나 발사 순간 신혼여행차 상해에 온 영국인 신부가 다나카 앞을 지나다가 총탄에 맞아 즉사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놀란 다나카가 황급히 자동차로 달려갈 때 제2선을 담당하였던 김익상이 재빨리 발사하였으나 총탄은 다나카의 모자만을 관통하였다. 이에 제3선을 담당하였던 이종암이 몰려든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오면서 폭탄을 던졌으나, 폭탄마저 불발됨으로써 다나카 저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저격에 실패한 이들은 곧바로 도주하였는데, 이때 이종암은 곧바로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던지고 군중 속으로 숨어들어 체포를 면했지만, 김익상과 오성륜은 사천로에서 경찰에 붙잡혀 일본총영사관으로 인도되었다가 나가사키로 이송되었다.

그 뒤 오성륜은 탈옥에 성공하여 중국으로 피신하였지만, 김익상은 21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다나카 저격사건으로 불행하게 신부를 잃은 영국인 톰슨은 저격자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인물임을 알고 일본 사법당국에 김익상을 관대하게 처리하도록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탈옥하여 중국에 온 오성륜은 그 뒤 계속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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