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경방 임시정부 요인 숙소, 신규식 거주지, 중국공산당 창당회의가 열린곳
영경방 10호(김구와 임정요인 거주지)- 상하이 황피남로 350롱 일대
신텐디라 불리는 상하이의 핫플로 이동한다. 주변의 상가들도 고풍스러운 분위가 풍기는게 서울의 인사동을 연상하게 한다. 이곳에 임시정부 청사와 별개로 임정 식구들이 살았던 곳인 영경방이 있다.
영경방은 김구 선생이 1922년부터 1926년까지 거주한 곳이다. 지금이야 고급상가가 있는 번화한 곳이지만 당시에는 아주 하층민은 아니지만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김구선생님의 부인인 최준례 여사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는다. 오전에 보았던 임시정부 청사에서도 봤지만 이상하게도 중국 옛 건물의 실내계단이 유난히 가파르다.
둘째를 낳은지 얼마 안된 최준례 여사가 시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밥을 차리는 걸 미안해하며 도우려다 계단에서 낙상했다고 한다. 갈비뼈가 폐를 찔러 늑막염이 되었고 결국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결국 죽어가면서도 남편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안타까운 사연 이야기다.
최준례 여사의 임종을 지켰다는 정정화 선생님이 전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독립운동가 가족이 견뎌야 했던 삶의 무게가 어느정도 였을지.. 마음이 아플 뿐이다. 앞에서 빛나는 사람 뒤에는 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 영경방 10호와 최준례 여사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김구 선생이 거주한 ‘영경방 10호’는 대한제국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등을 지낸 김가진과 그의 아들인 김의한, 정정화 부부가 거주했던 곳이었다. 김의한은 1922년 김가진이 별세하자 영경방 10호를 김구 선생 가족에게 넘겼다.
김구 선생은 영경방 10호에서 모친인 곽낙원 여사, 아내 최준례 여사, 두 아들 김인, 김신과 함께 거주했다. 그러나 최준례 여사는 둘째 아들 김신을 낳은 후, 낙상사고로 늑막염이 발병했고 병세가 폐병으로 악화되어 1924년 사망했다. 당시 김구 선생은 일본 조계지에 위치한 홍구 병원에 입원한 아내의 병문안조차 가지 못했다.
훗날 최준례 여사의 묘비에는 김두봉이 쓴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이라는 묘한 글만 적히는데, 각 자음의 순서를 숫자로 바꿔 대입하면 ▲ ㄹㄴㄴㄴ해는 단기 4222년 ㄷ달은 3월 ㅊㅈ날은 19일이 된다. 이어 ▲ 대한민국 ㅂ해는 대한민국 6년 ㄱ달 ㄱ날은 1월 1일이 된다.
즉 해당 묘비명은 최준례 여사의 생일과 기일을 한글을 사용해 적은 것이며, 단기 4222년과 ‘대한민국 6년’이라는 표기를 통해 우리나라의 시작과 대한민국 정부의 출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https://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859676
신텐디 거리에서 약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져 영경방 근처에 중국 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장소가 있다고 해서 찾아가 봤다. 중국 공산당 탄생을 논의한 장소라는데 지금 중국정부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장소라서 그런지 경비가 삼엄하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과 수학여행 온 학생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북적인다. 상하이는 우리 임정의 무대이자 중국근현대사의 주요 무대이다.
신규식 거주지- 상하이 남창로 100롱 5호
이번 답사에서 새롭게 내 머릿속에 각인된 인물이 예관 신규식샘이다. 이름과 역할 정도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번 답사에서 이분의 흔적을 다녀보며 알게 된 내용은 이제까지 내가 몰랐던 임시정부의 새로운 역사였다.
신규식 선생님이 신해혁명에 참여한 인연이 중국국민당과 연결되고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세워지고 국민당 정부로부터 지원받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중국은 ‘꽌시’ 라 불리는 개인적 관계가 매우 중요한 사회라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런면에서 신규식 샘의 꽌시가 임시정부 초기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맞은편 살았다는 천듀수는 1915년 상하이에서 '신청년'을 발간하며 신문화운동에 영향을 준 인물로 쑨원과도 인연이 있고, 중국 공산당 창당에도 기여한 거물급 인물이다. 이런 인물과의 관계라는 것이 임시정부 활동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을지는 짐작이 되고고 남는다.
** 신규식**
1902년 무관학교 졸업하여 대한제국 육군 시위대에 배속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지방 진위대와 연결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하자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이때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쪽 눈 시신경이 망가져 시력을 상실, 이에 신규식은 흘겨본다는 뜻으로서 스스로 예관(흘겨 볼 예, 睨. 볼 관, 觀.)이라 불렀다.
경술국치를 맞자, 이듬해인 1911년에 청나라 상해로 망명해 쑨원과 천치메이 등의 중국 동맹회 간부들과 친교를 맺어 중국 동맹회에 가입한 뒤 신해혁명에도 참여했다. 신해혁명에 참여한 유일한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1917년 7월에 공화주의 독립선언서인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대동단결 선언은 제국에서 민국으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왕치에서 법치로, 신민(臣民)에서 인민(人民·市民)으로 하는 민주와 공화제 법치정부의 구성을 표방하는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천명한 것이었다. 이 선언은 최초의 독립선언문이었으며, 민주와 공화의 국가 대한민국건국과 임시정부수립의 기반이 되었다.
1918년에 여운형을 지도하여 신한청년당의 조직을 지원했다.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다. 이듬해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이승만과 이동휘가 임시정부를 떠나자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이 되어 11월 3일에 쑨원이 이끄는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임정의 승인과 지원을 얻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2년에 단식으로 몸이 악화된 상태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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