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만에 자전거를 타고 공원에 갔다. 혹시나 싶어 X-게임장을 기웃거렸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아이들 속에서 이소정을 찾았다. 눈에 익은 노란 티셔츠가 보였다. 고개를 빼고 유심히 보니 이소정이었다.
이소정은 턱을 두 개나 넘고 경사면으로 질주했다. 위에서 턴을 하더니 시원하게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러고는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착지했다. 세상에! 보드가 이소정의 발에 붙은 것 같았다. 현란한 묘기에 나는 그만 넋이 빠져 버렸다.
싱글거리며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이소정을 바라보았다. 까무잡잡한 이소정의 얼굴이 빛났다. 어우러지지 않는 옷차림도 더는 촌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대단하고 멋져 보이기만 했다. 내 마음이 이상하게 된 것 같아 나는 혼자 어리둥절했다.
“백승찬, 한번 타 볼래?”
어느새 이소정이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대놓고 보다가 들키고 만 것이다. 이소정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순간, 가슴에 바람이 일렁거렸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한 번도 스케이트보드를 타 본 적이 없었다. 보드 위에 올라타면 어떤 기분일지 몹시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운동신경이 둔해 탈 자신은 없었다. 그런데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소정 때문에, 이소정의 웃는 얼굴 때문에.
나는 홀린 듯이 이소정의 보드 앞에 섰다. 이소정이 자신의 헬멧을 벗어 주었다. 손목 보호대와 무릎 보호대까지 다 벗어 주었다. 나는 이소정이 주는 대로 엉거주춤 다 착용했다.
보드 위에 발을 올렸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두 발을 다 올리자 보드가 움직거려 휘청거렸다. 바퀴가 그대로 굴러갈 것 같아 다리가 후들거렸다.
“양다리에 힘을 딱 주고 서 봐.”
나는 이소정의 말대로 힘을 주고 섰다. 이소정이 마주 서서 느닷없이 내 손을 잡았다.
“워밍업으로 내가 끌어 줄게. 일단 보드에 탄 기분을 느껴 봐.”
나는 아찔했다. 다리도 후들거리는데다 이소정이 내 손을 잡고 있으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소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도 정신을 가다듬고 이소정을 따라 움직였다.
“자, 이제 한 발을 내리고 밀면서 반동으로 한번 타 봐.”
이소정이 손을 놓고 코치처럼 말했다. 나는 이소정이 하라는 대로 한쪽 다리로 땅을 박찼다. 그리고 보드 위에 얼른 발을 올렸다. 우와, 스릴이 넘쳤다. 얼마 못 가 흔들리며 멈추고 말았지만.
“보기보다 균형 감각이 있네, 백승찬.”
이소정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소정의 칭찬에 어깨가 쫙 펴졌다. 나는 조금 더 힘차게 다리로 밀고 보드에 올라탔다. 아까보다 보드가 더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나아갔다. 그러다 그만 그대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보드는 저만치 굴러가고 나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소정이 풋 하고 웃었다. 아, 창피해.
“너, 자전거 탈 때도 많이 넘어졌지?”
이소정이 내 자전거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 운동신경 둔하다고 흉보는 거야, 뭐야. 나는 불퉁한 채로 아무 말도 안 했다.
“근데 지금은 엄청 잘 타잖아. 그치? 이것도 그래. 처음엔 많이 넘어져. 나도 그랬거든.”
이소정이 해맑게 웃었다. 내 마음도 스르르 풀어졌다. 이소정은 여기서는 잘 웃는구나. 원래의 이소정 모습을 보는 듯했다. 가슴에 뜨뜻한 것이 들어찼다.
나는 조금 더 보드 연습을 하다가 헬멧을 벗었다. 이소정은 내가 건넨 헬멧과 보호대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보드를 챙겼다. 자전거에 올라탄 나는 잠깐 머뭇대다 물었다.
“태워 줄까?”
갑작스러운 내 말에 이소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두 번째 보는 모습이다.
“무거울 거 같아서…”
“괜찮아. 늘 이러고 다녀.”
이소정은 보란 듯이 옆구리에 보드를 척 끼고 웃었다. 나는 머쓱해져 머리를 긁었다.
“그럼 내일 학교에서 봐.”
이소정이 가볍게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왠지 그대로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없었다.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천천히 이소정 뒤를 따랐다. 자전거를 끌고서. 기척을 느낀 이소정이 돌아보았다. 왜 그러냐는 듯이 눈으로 물었다.
“그냥… 좀 걷고 싶어서.”
“비 오는 데 우산 안 쓰고 가는 거랑 같은 거 아냐?”
“괜찮아. 비 맞고 싶을 때는 그러는 거지 뭐.”
이소정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좀 어이가 없다. 하지만 그러고 싶은 걸 어쩌나. 나는 자전거를 끌며 이소정과 나란히 걸었다.
“이소정, 저번에…그 일 미안해.”
나는 머뭇거리다 겨우 말했다. 이소정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
말문이 막혔다. 바로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내가 설명해야 하다니 난감했다.
“백승찬, 그동안 네가 잘못한 게 하도 많아서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소정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구나, 그랬구나. 그 일 말고도 이런저런 잘못이 많았다. 멍해진 내 모습에 이소정이 풋 하고 웃었다. 톡 터지는 귤처럼 상큼한 웃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나, 너 좋아해도 괜찮아?’
나는 속으로 이소정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소정은 내 곁에서 씩씩하게 걸었다. 가을 냄새를 실은 바람이 훅 불어왔다.